장개석 평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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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늘 일치하는 건 아니다.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이 1975년 4월8일 88세를 일기로 서거했을 때 쏟아진 평가도 그랬다.
「포드」미국 대통령은『중국 역사의 한 시대가 끝났다』고 하면서『장 총통은 그의 신념과 용기, 원칙에 대한 헌신으로 전세계 인류로부터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중공과 수교의 문을 연「닉슨」역시『우리 시대 역사의 거인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공의 신화사 통신은 그때『중국 인민의 공동의 적이었다』고 저주했다.
어쩌면 당연할 것 같은 이같은 평가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너무 쉽사리 뒤바뀌는 느낌이다.
1938년에 모택동은 주은래를 통해 국공합작시대를 상징하는 한 친서를 보냈다.
『개석선생, 은래 등 여러 동지가 연안으로 돌아와 선생의 성덕을 찬양하고 감복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전 민족이 추진하고 있는 공전의 위대한 민족혁명전쟁을 영도하고 무릇 중국인으로서 숭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산주의자 모택동이 장개석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냈던 시대도 있었다.
모택동의 찬사는 뒤에 적대자에 대한 증오로 변하기는 했지만 장개석이「중국을 열애하는 혁명가」였다는 것만은 늘 인정했다.
장개석은 공산군에 의해 대만으로 밀려나 본토 수복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달관한 정치가로서 한 시대의 세계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신의와 성실을 지키며 꿋꿋했던 그의 용기는 특히 후세 정치인들에게도 귀감이 됐다.
1936년 그는 장학량에게 감금되었던 서안사건 때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8개항의 요구조건을 모두 거절했다.
『내 몸은 죽일 수 있고 사지를 찢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중화민족의 인격과 정기는 보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같은 용기는 그의 어머니 왕태 부인의 훈도의 영향이 컸다고 여동방의『장개석 평전』 은 설명하고 있다.
신해의거에 나서는 아들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는 격문과 같았다.『살고 죽는 일에 임해서는 한결 같이 의를 따질 뿐 집안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생사일시어의모이가사위념).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던 장개석은 일면 지순하고, 일면 용기 있는 한 생애를 살았다.
그 때문에 그를「비적」으로 보았던 중공도 지금「민족성을 발휘한 영웅」으로 평가하면서 그의 생가 등 유적마저 복원하고 있다.
31일로 탄생 1백주년을 맞는 장 공의 유덕을 새삼 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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