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이 고맙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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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31면

나흘 뒤면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忌日)이다. 선친은 시골 분이다. 평생 육체노동으로 가족을 건사하면서 자식 자랑 하나를 위로로 삼으시던 분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시던 관리가 되는 소원을 삼형제 누구도 들어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막걸리 잔 위로 자식 자랑을 그치지 않으셨다.


기댈 언덕이 없는 시골이어서일까. 청와대를 출입할 무렵 아버지는 전화로 동네 사람들의 민원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알았다는 말만 하고 넘어가기를 여러 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이런 걸 자꾸 전하시면 자식이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며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마시라고 단호하게 말씀 드렸다.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거절했을 때 들어야 할 원망을 아버지 혼자 감당하셨다. 자식에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그때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 그렇다고 나는 깨끗하게 살았을까.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이 가득하다. 지난해 김영란법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을 때 한 법조인 선배가 말했다. “주요 언론사 간부를 만나 골프 약속을 하려 했더니 올해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 아직도 몇 달이 남았는데, 주말마다 꽉 차 있더라. 그거 다 접대 아니냐.” 그러면서 그는 “김영란법 적용대상에 언론인도 넣자고 칼럼을 쓰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주말 약속을 연말까지 꽉 채워놓은 그런 기자를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기자가 있기는 한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혹시 내키지 않는 약속을 피하려는 핑계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필자 역시 접대 골프에 익숙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내 주머니 돈으로 계산한 것이 오히려 드물다.


그렇게 하나 하나 짚어보니 기자에게 민원을 부탁하려는 시골 사람의 판단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컴퓨터 추첨으로 끼어들 여지가 없어졌지만 군 입대와 배치, 명절 기차표 구하기, 여권 발급, 병원 진료 순서, 검찰과 경찰의 수사 편의, 심지어 취업과 인사까지…. 기다리는 순서대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샛길이 허용된 시절이 있었다. 거기에 기자들도 한몫 끼어들었다.


대부분 바로 잡혔다. 사회 관행도 많이 바뀌었다. 공짜 밥 먹고, 공짜 여행하는 건 필자가 젊었을 때나 통했던 이야기다. 요즘 젊은 기자들에게는 억울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만은 아닌 모양이다. 믿기지 않지만 최근에도 한 언론인의 공기업 간부 연임 로비가 말썽이 됐다. 필자가 관여하는 한 정부 위원회와 관련해서도 끊임없이 민원이 들어온다.


변명을 하자면 그래도 그런 유혹을 거부하는 기자를 더 많이 봤다. 젊은 기자들은 “구악(舊惡)의 잘못을 왜 우리에게 떠넘기느냐”고 화를 낼 수도 있다. 필자도 명절 귀성하는데 12~14시간씩 운전해야 할 때가 있었다. 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기차표들이 뒷문으로 새고 있을 때도 한 번도 부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인사 청탁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그 정도로 잘 한 줄 알았다. 그러나 김영란법을 통해 다시 비춰보면서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고 습관이 된 접대문화를 바로보게 됐다. 어쩌면 청탁을 외면하는 다수의 선량한 공직자 때문에 김영란법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과거 기자들의 유행어 중에 ‘먹고 조진다’는 말이 있다. 접대 받을 건 받고, 비판할 건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도 있다. 필자도 인간적 교류로만 생각했다가 갑자기 상대방이 난처한 부탁을 할 때 당황했던 적이 있다. 직접 부탁은 아니라도 술잔을 넘기며 나누는 이야기가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걸 경험하기도 했다. ‘먹고 조진다’는 건 변명일 뿐이다.


대개 청탁은 공직을 사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맛있는 밥을 먹고, 골프를 즐기고, 공짜 여행을 하고…. 먹고 조진다는 변명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며 공적 이익을 사적 이익으로 바꾸는 것이다.


더욱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의 부탁이다. 한 고향 선배는 공직에 있으면서 청탁을 매정하게 잘랐다. 이해 관계에 있는 업자를 만나달라는 고향 선배의 청도 외면했다. 외면당한 그 선배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 공직자를 비난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김영란법 시행에 “공무원들이 가장 좋아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부정한 청탁을) 거절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을 들으면 다 딱하다. 대학병원 암병동에서 몇 달씩 수술을 기다린다. 급하지 않은 환자가 없다. 그런데 몇 달을 기다리고, 또 끼어드는 사람에 밀린다고 생각해보라. 살아가면서 ‘돈 없고 빽 없는’ 설움을 가장 크게 느끼는 때다. 그런데도 청탁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절하는 사람이 내 아버지, 내 아들의 수술을 가로막는 평생 원수다.


김 전 대법관의 말대로 이제 공무원이나 기자나 교사나 거절할 명분을 얻게 됐다. 아버지 혼자 동네 친구들의 청을 듣고는 우물쭈물 변명할 필요가 없게 됐다.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바뀔 수밖에 없다. 김 전 대법관 말처럼 ‘소수의 악당들이 저지르는 거대한 부정부패’만 문제가 아니다. ‘다수의 선한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젖어 있는 부정’은 그 사회의 품격, 국민성을 좌우한다.


이미 언론사들은 변화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취재용 식비를 지원하고, 법인카드도 지급하는 곳이 생겼다. 대학교수들도 외부 세미나를 줄줄이 취소했다. 외부 강연을 포기하고 책이나 쓰겠다는 교수도 있다. 부패한 관행으로 즐기는 것은 허상이다. 값비싼 식사를 대접받는다고 자기가 특권층이 되는 건 아니다. 그 대가로 얻는 공정한 시각과 독자 신뢰는 비교할 수 없게 값진 것이다.


물론 보완할 부분도 있다. 청탁이 아니라 꼭 필요한 강연도 있다. 기자들을 재교육하고, 연수하는 일도 계속해야 한다. 대기업이 만든 재단이 문제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거품을 걷어낸 뒤 존립도 고민거리다. 해마다 적자가 나도 언론사는 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통하지 않게 됐다. 망하지 않게 하는 청탁이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익을 위해 필요하고, 그런 역할을 요구해 김영란법에 집어넣었다면 건전하게 역할할 생태계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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