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촌생활 주진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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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회사로부터 현장 근무령을 받은애들 아빠를 따라 생면부지의 당진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조용한 어촌마을인 이곳엔 거대한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게 됨에 따라 우려처럼 집을 떠나 이사온 근로자들도 많이 있었다.
타향객지생활이라 처음엔 서먹서먹하기도 했지만 세속에 때묻지 않은 마을사람들의 순박한 인정으로 차츰 어릴적 고향에 온듯 모두가 낯익게 느껴졌다.
미역을 따서 울타리에 가득 널어 두고 산나물을 캐어 양푼에 가득 무쳐 할아버지·할머니·손자까지 두리반에 빙둘러 앉아 식사하는 정경은 마치 내 어릴적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여 입가엔 절로 웃음이 스민다.
동네아주머니들을 따라 밭에 나가 오랜만에 호미도 잡아보고, 모깃불 피워놓고 밤가는줄 모르고 주인댁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내는 동안 다시 본사 발령이 나 이삿짐을 챙겨야만 했다.
다시 내집으로 돌아간다는 즐거움 반, 정든 이웃들과 작별한다는 아쉬움 반의 미묘한 마음으로 짐을 꾸리는데 주인댁에선 큰 자루 하나를 슬쩍 잠결에 밀어두신다.
여름내 뙤약볕에 그을려 가며 가꾸신 감자며 호박이며 가지·콩들을 마대 가득 따오신 것이다.
마치 딸을 보내듯 서운해 하시는 아주머니의 정이 새삼느껴져 감자부대를 받아 들고는 나도 모르는새 콧등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핑돌았다.
세상은 날로 삭막해지기만 하고 사람들의 인심은 각박해져만가는 요즈음, 아직도 우리 고향의 어느 한귀퉁이엔 이렇듯 따스한 인정이 남아있다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오는 발걸음이 그렇듯 가벼울 수가 없었다. 이제 나도 서울사람들에게 사람사는 이치를 보여줘야지.<서울 관악구 신림7동 675의213호·29통6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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