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터널’에 갇힌 희귀소아암 환자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기사 이미지

양선희
논설위원

이 모든 사달은 결국 돈 10억원 때문이었다. 지난달 한 포털사이트에 ‘소아암 희귀의약품 생산 중단 사태를 막아 달라’는 글이 올라왔다. ‘신경모세포종’이라는 소아암 치료제인 방사성 의약품에 대해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내년부터 생산을 중단하라고 해 환자와 가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병은 재발이 잘돼 꾸준한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고약한 종양이라고 했다. 그나마 재발 위험을 낮추는 방사성 의약품 치료법(MIBG) 덕에 전신 방사선 치료를 할 경우 생기던 성장 장애 등의 부작용을 완화하며 덜 고통스럽게 치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치료에 쓰이는 약품 ‘131아이오딘’이 매년 국내에서 쓰이는 양은 200병 정도. 워낙 소량이라 일반 제약회사에선 채산성이 맞지 않아 생산하지 않고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만들어 공급하고 있다. 연구원은 이런 소량의 희귀 치료제를 몇 종 더 생산한다. 본업은 아니지만 환자의 치료 편의를 위한 중요한 가욋일인 셈이다.

한데 지난 6월 연구원 측이 내년부터 이 약을 포함한 5종의 치료제 공급을 중단한다는 공문을 약품사용처에 보내면서 의료진과 환자들을 패닉에 빠뜨렸다. 사연은 이랬다. 식약처가 모든 의약품 제조는 제조 및 품질관리에 관한 국제 기준(방사성의약품 GMP)에 따라야 한다며 이 기준을 갖추지 않은 연구원에 기준을 맞추라고 통보한 것이다. 연구원 측은 이를 위한 추가 설비 견적을 내보니 10억원이 필요했다. 현재 짓고 있는 기장 원자로가 완공돼 입주하면 자동으로 해결될 문제다. 한데 원래 내년 입주 예정이었던 연구소 완공 시점이 2년 더 연장됐다. 연구원 관계자는 “2년 정도 쓰자고 10억원을 투자하면 중복 투자에 예산 낭비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식약처는 “GMP는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국제적 신인도를 높이기 위해 제조와 품질을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동남아 국가들도 맞추는 GMP 기준을 우리가 맞추지 않고 국제 경쟁이 되느냐”고 했다. 실제로 그동안 소아암 환자 치료제를 기준에 미달한 설비에서 생산해 온 것도 문제이긴 하다.

그래도 의료계는 이 치료법이 중단되면 환자의 고통과 부작용이 너무 크고, 방사성 치료제라 수입으로 대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소아혈액종양학회·대한핵의학회 등 관련 의학계에서 “생산 중단을 철회해 달라”는 공문도 보냈다. 성기웅 서울삼성병원 소아과 교수는 “환자 수가 많지 않다고 이렇게 쉽게 아무 대책 없이 생명이 걸린 약품 공급을 끊어버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했다. 또 “방사성 의약품은 국내 종양 치료의 기본 인프라로 이익이 안 된다고 쉽게 생산 중단을 결정하는 정책환경에선 표적 방사선 치료 분야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도 했다

이 사연은 지난주 JTBC뉴스룸(8월 30일)에서 보도됐다. 그 이후가 궁금해 식약처와 원자력연구원 관계자들에게 물었더니 “내년 이후에도 의약품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하겠다”며 완고했던 기존 입장에선 살짝 물러나 있었다. 식약처 관계자에게 앞으로의 구체적인 대책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보도가 나온 지 며칠 안 됐는데 무슨 구체적 대책이 있겠나. 좀 기다려 달라.” 연구원 관계자도 이렇게 답했다. “식약처와 상의하겠다.”

어쨌든 공급 중단 입장이 전향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보여 반가웠다. 그런 한편으론 이 나라가 무섭고 답답했다. 400조원의 수퍼예산을 짜면서도 아이들의 생명과 직결된 10억원 예산은 주저하는 나라. 10억원 때문에 희귀질환자 치료제 공급 중단을 냉큼 결정하고 언론이 나서서 떠들기 전엔 문제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나라. 국제적 신인도, 경쟁력, 효율 등 명분을 국민 생명보다 앞세우는 게 습관화된 듯 보이는 관료조직. 우리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생명 경시의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