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한국경제, 다시 시작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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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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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전 국무총리·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내가 다니던 소박한 밥집이 문을 닫았다. 장사가 반짝 잘되는 걸 본 건물 주인이 월세를 대폭 올려 달라고 해서였다. 그 밥집 부근에 있던 포장마차도 문을 닫았다. 손님이 없어서였다. 밥집은 집주인의 횡포로, 포장마차는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 악화로 문 닫은 것이다.

되새기는 조순 선생 장기적 안목
근본으로 돌아가야 지속 발전
만병통치약도, 지름길도 없어
국민이 단기적 비용 인내하고
지도자가 먼저 욕심 버려야
모두가 살고 동반성장도 가능

제조업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많은 중소기업이 부도로 신음하고 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각종 불공정 행위다. 대기업도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일이 다반사다. 한국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대 위기다. 단순한 경기(景氣) 문제가 아니다. 실력도 모자란다. 선진국을 따라 하는 추격형 성장일 때는 크게 어렵지 않았으나 이제 상당히 따라잡고 나니 경쟁이 만만치 않다. 그들은 정보기술 혁신과 4차 산업혁명으로 저 멀리 앞서가고 있다.

이러한 국내적 어려움에 세계적 대불황(大不況)이 겹쳐 한국경제는 2중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통적인 정책수단인 금리·통화량·재정지출·세금 등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으로 증명됐다.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경제를 바라봐야 한다.

조순(趙淳) 선생의 ‘資本主義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經濟運營의 원리’(2015년 학술원 논문)에 따르면 한국경제를 지속 발전이 가능한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과 경제외적 기반을 다져야 한다. 경제적 기반이란 ①생산에 필요한 노동력과 자본의 원활한 수요와 공급 ②높은 수준의 과학기술 ③부와 소득분배의 형평 ④투자와 저축의 균형을 말한다. 그리고 경제외적 기반은 ⑤국민의 지성과 덕성을 닦는 교육 ⑥강하고 유능한 정부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 ⑦경쟁과 협력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질서, 그리고 ⑧좋은 전통과 관습이 자라는 문화다. 이것들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긴 안목에서 경제를 포함해 우리나라의 밑바탕이 되는 자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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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점검해보자. ①기축 통화국들이 돈을 넉넉히 풀어왔기 때문에 자본조달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노동력은 부족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아깝지 않을 고급 노동력이 아쉽다.

②과학기술 수준은 응용 분야는 몰라도 기초·첨단 분야가 부족하다. 연구개발(R&D) 지출이 세계 5위라고 하지만 대부분 개발에 대한 지출이고 연구 지출은 많지 않다. 연구도 본격적인 연구보다는 남의 아이디어를 조금 고치는 정도(refinement)밖에 안 된다는 지적이 있다.

③부와 소득분배는 미국보다 평등할지 몰라도 일본이나 유럽보다는 훨씬 불평등하다. 상위 1% 사람들이 15%의 소득을, 상위 10%가 47%를 차지한다.

④대기업은 천문학적인 규모로 저축을 하지만 투자는 안 한다. 첨단·핵심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중소기업은 투자할 곳은 많은데 돈이 없다. 그래서 대기업에 고인 돈이 중소기업으로 흐르게 하려는 동반성장(同伴成長) 아이디어가 나왔다. 초과이익 공유,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중소기업 우선의 정부구매 등을 통해서 말이다. 한편 총수요, 특히 소비 증가를 위해 서민의 구매력을 증대시켜줄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⑤교육은 어떤가? 총체적 부실이라고들 한다. 교육에 막대한 공적·사적 자원이 들어가나 건전한 상식, 상당한 전문지식 그리고 미래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창의성을 두루 갖춘 사람은 흔치 않다. 초·중등교육은 지·덕·체가 아니라 체·덕·지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대학에 좀 더 과감한 투자를 하되 자율성은 지금보다 훨씬 높여줘야 한다.

⑥정치는 국민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국민이 정치지도자로 충분한 준비 없이 정치공학에만 능통한 사람들을 잘못 뽑은 탓도 있다. 그럼에도 한 국가의 지도자는 올바른 시대정신을 갖고 국가 발전의 구체적 비전과 그 실천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최적의 인적 자원을 중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⑦무한경쟁이 판을 치고 남에 대한 배려는 사라진 사회에서 상생의 협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공동체 정신은 실종되었다.

⑧정상적인 사회라면 정직, 정의감과 자기 성찰이 가장 본받을 만한 생활 방법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전통을 확고하게 못 세웠다.

결론적으로 한국경제의 지속 발전을 위해서는 근본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여러 가지 부족함을 메워야 한다. 만병통치약도 지름길도 없다. 국민이 단기적 비용을 인내해야 하고, 무엇보다 지도자가 먼저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동반성장의 길이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