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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없는 산업은행의 자회사 CEO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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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이태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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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경제부문 기자

“누구를 위해 최고경영자(CEO) 선임 절차를 자꾸 바꾸는 건가요. 이런 불투명한 방식으로 선임된 CEO가 종업원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새 CEO 선임을 두고 벌어진 ‘낙하산 인사’ 논란에 대해 대우건설의 한 직원이 기자에게 털어놓은 넋두리다. 대우건설의 대주주인 산업은행이 6월 내부 공모를 했다가 한 달 만인 7월에 외부인사를 포함한 재공모에 나선 걸 두고 한 얘기다. “적임자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산은의 해명에도 대우건설 직원 사이에서는 “낙하산 인사를 위해 선임 절차를 바꾼 게 아니냐”는 의심이 커졌다. 최종 압축된 2명의 후보 중 산은이 외부 인사를 선호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논란을 자초한 건 산은이다. 그간 수차례 낙하산 인사 논란이 반복됐는데도 자회사 CEO 선임 절차에 일관된 원칙을 마련하지 않았다. 산은 자회사 132곳의 CEO 선임 절차가 모두 제각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대우건설만 해도 3년 전인 2013년에 사장을 선임할 때는 외부에 공모했다. 그런데 이번엔 돌연 내부 공모로 바꾸면서 불신이 커졌다. 결국 다시 2013년처럼 외부 공모를 하겠다고 하자 낙하산 의혹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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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산은의 또 다른 자회사인 대우조선해양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2012년 고재호 전 사장을 선임할 땐 사장후보추천위원회(사추위)를 구성했지만 지난해엔 사추위 구성 없이 산업은행이 정성립 현 사장을 단독 후보로 이사회에 추천했다. 그 당시에도 대우조선 직원 사이에선 “산은이 원하는 사장을 선임하기 위해 절차를 바꿨다”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달 출자전환으로 산은 자회사가 된 현대상선의 경우엔 공모나 사추위가 아닌 3개의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 CEO 후보군을 압축하고 있다.

산은은 “민간 기업이라 각 정관에 따라 사장을 선임해야 한다”고 해명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각 자회사의 정관엔 “이사회 결의로 이사를 선임하고, 이 중 1인 이상을 대표이사로 정할 수 있다”는 상법상의 규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기준은 없다.

대우조선해양의 5조원대 부실은 회사의 미래보다 임기 중 자신의 성과 포장에 중점을 둔 낙하산 CEO에서 비롯됐다. 산은이 이런 전철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투명하고 객관적인 자회사 CEO 선정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내부 직원과 외부 전문가를 포함한 사장후보추천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치열하게 토론하다 보면 낙하산 의혹이 나올 수가 없다. 산은 임원들이 대우조선 부실 책임을 통감한다며 성과급을 반납하는 것보다 자회사 낙하산 방지책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한 쇄신안이다.

이태경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