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사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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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20년이 된다.
65년 7월19일 하와이의 마우나라니 병원 202호실에서 그는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 국민치고 그를 모르는 이는 없다. 그에 대한 인상과 평가가 제각기 다르지만 국민의 가슴에 길다란 그림자를 남기고 간 것 만은 사실이다.
최근 국무총리까지 지낸 한 은퇴정객은 이박사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경험담을 전했다.
부산피난시절 이박사는 신문 검열을 건의받고 이를 한마디로 일축했던 일이 있었다.
『이 전시중에 국민이 믿고 의지해야할 곳은 그래도 신문뿐인데 그걸 검열하게 되면 국민이 무슨 재미가 있겠나』 하는 것이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사전에 누설, 보도되었던 당시 군으로선 신문의 자유보도가 걱정을 넘어 눈의 가시였을 것이다.
그 부산피난시절에 국회가 수난을 겪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박사의 첫번째 임기가 끝나던 1952년 피난 수도 부산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공병대가 크레인으로 등원중인 국회의원을 버스에 태운 채 헌병대에 구금하고 야당의원들을 잡아다 감시 속에 거수결의로 발췌개건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그 골칫거리 국회를 해산하자는 막료들의 진언에 이박사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나라의 민주적 운영이 긴요하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쟁중에 대통령 직접 선거가 예외없이 실시된 것도 그런 신념의 결과였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사건에 분격해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고, 뒤를 이은 김성수 부통령이 계엄 발동을 개탄하며 사표를 던졌던 것도 그때다.
그 시절엔 사법부도 엄정 독립을 지키고 있었다. 55년2월 이박사가 국회에 보낸 메시지에서『삼권분립한 중에서 사법부의 형편이 말이 아니니…』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을 때 대법원장 김병로는『법관은 독립하여 재판하는 것인 만큼 대법원으로서도 지시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반박했던 일도 있다. 사법권이 온전했다는 얘기다.
이박사의 검약생활도 인정해야한다. 그의 파나마모자는 수십년 사용해 앞부분이 이미 해어져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걸 낚시할 때 쓰기 위해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 외화를 아끼는 데도 그는 유난스러웠다. 외국에 나가는 대사들이 쓸 비용도 자신이 직접 결재했고, 출국인사 땐 반드시『달러를 아끼게』하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 시대도 이제 옛날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인간상과 정치행태에선 지금도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이부사의 일면에만 집착했던 평가작업도 이젠 점차 객관화되어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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