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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에 반대하는 오바마의 이중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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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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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쿠퍼맨
텍사스 오스틴대 교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워싱턴에 전 세계 정상들을 초청해 제4차 핵안보정상회의를 열었다. 오바마의 제안으로 2년마다 개최돼 온 핵안보정상회의는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멤버들이 핵 테러 위협에 맞서 공조를 논의하는 자리다. 이번은 오바마로선 마지막 회의다. 그런 만큼 오바마는 적극적인 비핵화 이니셔티브를 발표하고, 무기 감축에 비판적인 야당(공화당)은 오바마의 반핵 행보를 공격할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어느 때보다 과감한 군축 프로젝트를 밀어붙인 쪽은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였다. 오바마는 이상하게도 이런 움직임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황을 짚어보자. 지난 수년간 공화당과 민주당은 국제적인 고농축 우라늄 거래에 대해 우려를 표명해 왔다. 고농축 우라늄은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에도 쓰였다. 요즘 활동하는 테러집단들이 이 고농축 우라늄을 손에 넣으면 45㎏ 미만의 양으로도 히로시마급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

미국 정부는 1978년부터 미국 내 대학들의 연구용 원자로에서 쓰이는 고농축 우라늄 연료를 줄이는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무기로 쓰일 수 없는 저농축 우라늄 연료로 대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결과 수십 곳의 연구용 원자로에서 고농축 대신 저농축 우라늄을 쓰게 됐다.

그럼에도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 연료는 사라지지 않았다. 핵잠수함과 항공모함들이 무기급 우라늄을 계속 사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영국·러시아 해군이 연료로 쓰는 무기급 우라늄만 수t에 달했다. 전 세계 연구용 원자로의 연료를 모두 합한 것보다 4배 이상 많은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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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국 해군에서 쓰는 고농축 연료는 대단히 위험하다. 무엇보다 이 연료는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규정된 사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군사용이라는 구실로 국제사회의 감시를 피해 얼마든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해군용 연료란 핑계를 대며 고농축 우라늄을 축적해 온 이란이 대표적이다. 국제사회가 이를 막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해군용 우라늄은 운반과정에서 테러집단이 쉽게 가로챌 수 있다. 미국 해군이 좀 더 안전한 저농축 우라늄으로 연료를 바꾸지 않으면 1992년 이래 24년 만에 무기급 우라늄 생산을 재개해야 한다. 그러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무기급 우라늄 생산 중단을 호소해 온 미국 정부의 목소리는 명분을 잃게 된다.

지난해 미 의회는 해군용 저농축 우라늄 연료의 초기 연구 예산을 승인했다. 전 세계에서 해군용 핵연료를 가장 많이 쓰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미국 해군이 저농축 우라늄으로 연료를 바꾸면 전 세계 핵 연료의 판도도 바뀌게 된다. 당장 러시아 해군이 저농축 우라늄 전환 압박을 받게 된다.

오바마는 비핵화 어젠다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만큼 오바마는 당연히 저농축 우라늄 연구 프로젝트를 지지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오바마의 백악관은 반대 입장을 표명해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백악관은 “핵 담당 부처인 에너지부가 이미 비확산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라 예산을 따로 떼어내기 어렵다”는 구실을 댔다. 하지만 저농축 우라늄 연구야말로 비확산을 위한 최적의 수단임을 고려할 때 궁색한 변명에 불과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오바마는 보다 포괄적인 핵 관련 법안에 저농축 우라늄 연구 프로그램을 포함시켜 첫 1년에 한해서만 예산이 지원되도록 편법을 썼다.

오바마가 저농축 우라늄 연구에 대해 정말로 우려한 부분이 예산이었다면 다음 회계연도에 해군의 원자로 관련 부서에 예산을 지원하는 우회로를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 오바마가 제출한 2017년 예산안을 보면 저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배정된 예산은 전무하다. 필자가 에너지부에 이유를 물으니 “저농축 우라늄 연구가 진행된 지난 1년간 지켜본 결과 다음해에도 연구를 계속하는 걸 정당화할 근거가 발견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 역시 말이 안 된다. 핵 연료는 실행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 최소한 5년의 연구 기간이 필요하다.

백악관이 반대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야당이 지배하는 의회와의 정치싸움이 본질이다. 의회가 비핵화 프로그램을 과감히 추진하자 오바마는 반대로 돌아선 것이다. 그 결과 미국과 세계의 안보에 극히 중요한 저농축 우라늄 연구 프로그램은 조만간 급작스럽게 중단될 운명에 처했다. 미 의회가 특단의 조치에 나서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바마가 의회에 부리는 심술은 그야말로 근시안적이다. 오바마는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미 해군의 저농축 우라늄 연구를 대표적인 비확산 이니셔티브로 강조하고 다른 나라들도 미국의 선례를 따르도록 촉구했어야 한다. 미 해군의 핵연료를 저농축으로 전환하면 무기급 우라늄 거래를 인류 역사상 최대의 폭으로 감축할 수 있다. 이는 국제사회의 핵안보에 커다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오바마의 외교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해줄 것이다.

♦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3월 25일자 게재

앨런 쿠퍼맨 텍사스 오스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