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당시 군 관여” 일본 정부의 책임 명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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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한·일 두 나라의 협상은 과거와의 싸움이었다. 한국 정부 입장에선 역대 일본 정부의 사과보다 진전된 내용을 끌어내는지 여부가 핵심이었다.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의 고노 담화,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민단체가 수용하기를 거부한 ‘아시아여성기금’, 진보적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 시절 제안됐던 사사에 안 등이 비교 대상이다. 특히 ▶일본 총리의 사과 서한 ▶주한 일본대사가 피해자를 방문해 사죄 표명 ▶일본 정부 예산으로 인도적 조치 실시 등을 골자로 한 사사에 안 이상의 조치를 끌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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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일본의 법적 책임=공동 발표문에서 양국은 법적 책임 인정 문제를 문구를 조절해 풀어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이 읽은 발표문에는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썼다. 일본이 법적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판을 들어왔던 ‘도의적’이라는 수식어를 뺐지만 ‘법적인’이라는 문구도 넣지 않았다.

[위안부 협상 타결] 분석
한·일 공동 발표문에 담긴 내용
‘도의적’ 등 책임 회피성 표현 없어
고노 담화, 사사에 제안보다 전향적
아베 입으로 첫 사죄 표명도 진전

 한국 정부는 고노 담화에도 없던 일본 정부의 책임을 명문화한 것을 성과로 보고 있다. 고노 담화는 ‘일본 정부는 사죄와 반성의 심정을 말씀드린다’고 했을 뿐 정부의 책임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도의적’ 등의 수식어 없이 책임을 분명하게 인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재단에 일본 정부가 재단 출연금 전액(10억 엔)을 예산으로 내는 부분도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사에 안에도 일본 정부 예산이 포함됐지만 의료비 등 ‘인도적 조치’로 사용처를 한정했다. 이번 발표문에는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금’ 등으로 사용처를 확대했다.

 ②위안부 성격 규정=강제동원 등 위안부 문제의 불법성에 대한 부분은 과거에서 답을 찾았다. 일본 측은 발표문의 첫 구절에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고 썼다.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의 문구대로다.

 특히 일본 정부의 개입도 ‘군의 관여하에’라는 구절에 담았다. 조정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제법적으로 ‘국가기관의 행위는 그 기관의 지위나 성격을 불문하고 동 국가의 행위로 귀속된다’고 보기 때문에 일본군의 관여하에라는 표현도 일본 국가의 책임으로 귀속된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③사죄 표현과 형식=일본의 발표문에는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썼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2012년 12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분명하게 밝힌 건 처음이다. 아베 총리는 올해 4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 수준의 발언만 했다. 위안부를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로 표현하며 일본 정부의 책임을 교묘하게 피하기도 했다.

 성공회대 양기호(일본학과) 교수는 “아베 총리의 지금까지 행태로 볼 때 이번 발표문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과의 형식에서도 이전 사사에 안보다 진전됐다. 사사에 안은 총리가 사과 서한을 쓰고 정상회담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표명하는 수준이었다. 반면 이번에 일본 측은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했다. 한국 정부가 의미를 부여하는 대목이다.

 쟁점이 됐던 배·보상 문제는 한국 정부가 만들고 일본 정부가 돈을 내는 형식으로 풀었다. 외교부 당국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사업을 하는 데 한국이 사업의 취지대로 진행·운영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라며 “예전 아시아여성기금 때보다 창의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급되는 금전적 지원은 이번에 ‘치유금’으로 정리됐다. 아시아여성기금 당시엔 ‘위로금’이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

 ④최종 해법 명문화=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협상하며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 ▶최종 해결 담보 ▶국제사회에서의 비난 자제 등을 요구해왔다. 한국 정부는 소녀상은 민간이 설치해 정부 간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아왔다. 그래서 발표문에 소녀상 이전을 확정하는 대신 ‘일본 정부의 우려를 인지하고 관련 단체와 협의하겠다’는 표현을 썼다. 일본 측 요구를 모두 수용하진 않았지만 한국 측도 일정 부분 의무를 지는 형식이다.

 최종 해결 여부는 양국 발표문에 담겼다. ‘일본 정부가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한다’고 한 대목이다. 양국이 조금씩 양보했다고 한다. 일본 입장에선 위안부 문제의 최종 해결을 명시적으로 담보했다. 한국으로선 합의 이행의 조건으로 ‘일본 정부가 위안부 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함’이라는 문구를 볼모로 잡아뒀다. 정부 당국자는 ‘일본이 합의문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협상이 무효화되느냐’는 질문에 “일본 정부가 조치를 착실히 이행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협상”이라고 답했다.

 ◆엇갈리는 정치권 반응=새누리당은 “진전된 합의를 환영한다”는 입장인 반면 야권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외면한 것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장우 새누리당 대변인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진전된 합의안”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성수 더불어민주당(옛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은 “합의 내용이 이명박 정부가 2012년 3월에 거부한 일본 정부의 제안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절하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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