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기후변화 대응은 미래에 대한 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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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시민환경연구소 소장

전 세계 195개 국가가 합의를 도출한 파리협정은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외교적 승리’라는 영국 언론 '가디언'의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파리협정은 기후변화를 방치할 경우 국제사회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기후변화는 국지적 분쟁과 난민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등 지구촌의 안녕과 평화를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로 인식되고 있다. 협상 타결 지연은 곧 심각한 위기관리 실패라는 공감대가 없었더라면 파리협정은 탄생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변화 반영한 파리협정
한국에게 불리하지만은 않아
녹색경제 투자여부가 100년 좌우

하지만 파리총회 성공의 배경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된 현실이다. 파리협정은 ‘외교적 승리’ 이전에 ‘시장의 승리’였다. 저탄소경제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기술·금융·시장의 흐름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의미다. 미국에서는 223개 대기업이 오바마 행정부의 강력한 탄소규제정책인 청정전력계획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지멘스 등 363개 기업과 177개 투자기관은 ‘파리 서약’을 통해 강력한 기후변화 대응체제에 대한 합의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 같은 사례는 재생에너지와 저탄소기술이 이미 시장을 움직이는 강자로 등극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파리총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가장 많이 받은 스타는 단연 재생에너지였다. 이른바 ‘재생에너지 트랙’의 일환으로 촘촘하게 배치된 세미나에 참석한 인사들은 가격 경쟁력, 기후변화 대응, 일자리 창출, 공동체 발전 등 모든 면에서 재생에너지가 가장 유리한 에너지원임을 증언했다. ‘100% 재생에너지’는 이미 시민단체만이 아니라 정부대표·지자체장·기업CEO가 함께 외치는 가장 매력적인 슬로건이 됐다.

파리협정에 담긴 내용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래칫(ratchet) 매커니즘'이다. 방향을 정한 후 정기적인 검토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강화해가는 방식이다. 전진만 가능할 뿐 후퇴는 허용되지 않는다. 기업들이 투자계획을 세울 때 중요한 것은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5년 주기의 래칫 매커니즘은 저탄소산업에 투자하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금융시장에서 저탄소 투자에 드는 자본비용이 크게 낮아지면서 ‘한계비용 제로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한계비용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하나 더 생산할 때마다 들어가는 추가 비용을 말한다. 태양광·풍력·지열 등 재생에너지는 초기 시설비만 들이면 에너지원 공급 비용은 불필요하다. 브라질·남아공·미국·중국과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 풍력은 이미 가장 값싼 에너지원이다. 저유가 상황에서도 재생에너지는 보조금 없이 화석연료와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보이고 있다.

신기후체제 출범이 가시화하면서 우리나라는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하지만 화석연료가 거의 나지 않는 처지에서 신기후체제가 반드시 불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철강·석유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업종의 부담은 커지겠지만, 태양광·풍력·스마트그리드·에너지 저장장치·전기차 업계는 큰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

신기후체제 준비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법과 제도를 손질하고 사회적 논의기구를 구성해 국민의 총의를 모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책 합리성과 일관성이다. 일부 업종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국가경제의 미래를 통째로 희생시키는 우(愚)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된다. 석탄발전소 추가 건설계획 수정과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가로막는 제도 개선도 시급하다.

기후변화 대응은 미래에 대한 투자다. 파리협정을 통해 투자에 대한 보증수표는 마련됐다. 갈색경제와 녹색경제, 과거와 미래 둘 중 어떤 것에 투자할 것인가. 그 선택은 대한민국의 100년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시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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