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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를 압도하는 YS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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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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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런던특파원

YS는 높이 날기도 했지만 깊은 수렁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중 하루가 2000년 10월 어느 날이었을 게다.

 YS가 고려대에서 특강을 하려고 길을 나섰다. 총학생회가 막아섰다. 결국 고대 정문 앞에서 오전 10시50분부터 다음날 오전 1시7분까지 14시간여 동안 사실상 차 안에서 있었다. 막아서는 사람들은 오고 가도 YS는 그 자리에서 버텼다. 그날 평생의 라이벌인 DJ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공식 발표됐다. “김정일과 김대중이 합작해 방해, 강의가 무산됐다”고 여겼던 YS는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분개했다.

 다리를 풀러 잠시 차 밖으로 나온 그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무엇을 위해선가.” YS의 답변은 간결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총학생회가 막아선 이유는 이랬다. “김영삼씨는 기본적으로 나라경제를 망친 대통령이고 한보사태-김현철 비리를 일으킨 부패한 정치인이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억제하기 위해 진보세력을 탄압한 반민중적인 대통령이다. YS가 역사와 민중 앞에 사죄하지 않는다면 고려대 땅에 절대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왕소금을 뿌렸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세평도 YS에게 엄혹했다. 전문가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2010년 본지가 실시한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정치·행정·언론학 교수 등 전문가 100명에게 업적 여부를 물었더니 단 한 명도 YS를 들지 않았다. 비전과 의제 설정 능력에선 한 명만 YS를 떠올렸을 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 DJ(17)·노무현(16) 전 대통령에도 크게 못 미쳤다.

 지금도 그렇다고 여기는가. 누군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두고 자기 성공의 피해자라고 했었다. 박 전 대통령 덕분에 국가가 발전했지만 그로 인해 권위주의 통치가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YS도 자기 성공의 피해자였다. 민주주의를 앞당겼지만 그 덕분에 가능해진 권력자에 대한 조롱에 처절하게 시달리곤 했다.

 이젠 누구나 YS의 오랜 이력을 곱씹으며 과를 압도하는 공(功)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대통령들에겐 공도 과도 있다. 하지만 다들 나락으로 떨어진 모습으로 청와대를 나서곤 했다. 역사는 달리 평가해줄 것이라고 간구하면서.

 실제 DJ와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YS도 재평가되고 있다. 죽음이 계기가 됐다곤 하나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네들에겐 마땅한 일이다. 지금의 대통령은 어떤가. 공이 과보다 많다 할 수 있는가.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