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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총리 이런 분 안 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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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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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곧 당으로 돌아가긴 갈 모양이다. 슬금슬금 후임 하마평이 나온다. 누군가 흘린 듯 거론되는 인물도 비슷하다. 현재 청와대에서 일하고 계신 분, 또는 현직 장관급 경제관료, 또는 국책연구기관 수장이 그들이다. 광학 현미경이라도 들이대면 좀 다를까,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이 큰 기준이란 점에선 대동소이하다. 지금 거론 중인 분들 중에도 적임자가 있을 수 있겠으나, 솔직히 그 나물에 그 밥 아닌가. 나는 차기 경제부총리가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삼불삼가(三不三可)다.

 첫째 정치인불(不), 정치인 출신은 안 된다. 대통령도 곳간을 확 헐고 싶어진다는 게 정권 후반이다. 포퓰리즘의 유혹이 어느 때보다 커진다. 차기 부총리의 최대 임무는 이런 걸 막는 것이다. 경제를 활활 살리는 건 못해도 좋다. 더 망가뜨리지 않으면 족하다. 축구로 치면 골잡이보다 자물쇠형 수비수가 필요하다.

 가뜩이나 최경환 부총리가 어질러놓은 게 많다. 부동산 띄우기와 소비 활성화로 가계·나라 빚이 크게 늘었다. 대출 규제를 푸는 바람에 가계부채가 1130조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었고, 국가채무도 내년엔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처음으로 넘어서게 됐다. 최경환은 “빚의 절대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며 성장을 통해 부채비율을 낮추면 아무 문제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같은 100원의 빚이 1000원을 버는 사람에겐 큰 부담이지만 100만원을 버는 사람에겐 ‘껌값’이 된다는 의미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문제는 과연 성장이 말처럼 쉬운가다. 최경환은 스스로도 “과거와 같은 고성장은 끝났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우리 경제, 우리 국민이 저성장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헷갈린다.

  최 부총리의 말을 종합하면 예컨대 ‘성장 없이 빚을 늘려도 부채비율은 높아지지 않는다’는 식이다. 이 얼마나 현묘한 수사인가. 정치인 출신답게 ‘불타는 얼음’ ‘차가운 불꽃’을 만들어낸 셈이다. 하지만 경제는 숫자로 말한다. GDP와 부채비율, 수출·투자·소비는 정치적 수사만으론 좋아지지 않는다. 다음 부총리는 숫자로만 말할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정무형불(不), 정무형 인사도 금물이다. ‘국정의 연속성’ ‘국정의 일관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말짱 헛소리다. 말이 좋아 ‘정무적 감각’이지 실상은 눈치코치로 당과 청와대에 알아서 협조하라는 것 아닌가. ‘국정의 연속성’은 또 뭔가.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빚을 크게 늘려놓은 초이노믹스를 잇자는 것 아닌가. 안 되는 건 똑 부러지게 안 된다고 하는 원칙주의자가 차라리 낫다.

 셋째 정권지분불(不), 정권에 지분을 쥔 인물은 안 된다. 힘을 과시하느라 인사 전횡을 하기 쉽다. 최 부총리의 사람 챙기기는 정치권이며 경제 쪽에 정평이 나 있다. 최근 불거진 몇 건의 취업 청탁 의혹을 놓고 진위 여부를 떠나 “(최경환이면) 능히 그랬을 것”이란 평판이 많은 이유다. 그런 평판이 정치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경제나 나라 살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패거리 문화로는 절대 성과를 낼 수 없는 게 경제이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덕목도 세 가지 있다. 격변하는 세계 무역·경제 환경을 꿰뚫는 국제적 감각이 그 하나요, 복지부동 중인 공직사회를 휘어잡아 움직이게 할 강단과 소신이 그 둘이요, 나라 살림을 제 살림 보듯 하는 무(無)사심이 셋이다. 여기에 임기가 끝나도 정치판을 기웃거리지 않을 분이면 금상첨화다. 그런 분이 어디 있느냐고? 대한민국은 넓다. 찾고자 하는 눈이 없을 뿐이다. 우물 안에서만, 자기 편에서만 찾으려니 안 보일 뿐이다. 최경환 부총리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경제는 저보다 잘할 사람이 많다”고.

 사족 : 이미 후임 부총리가 내정됐다는 얘기가 많다. 이왕 바꾼다면 시기는 이를수록 좋다. 연말 교체는 정치적 부담이 커진다. 연초부터 내년 총선 때까지 질질 인사청문회에 시달려야 할지 모른다. 경제도 덩달아 영향을 받는다. 예산안이나 노동·금융 개혁은 꼭 최 부총리가 있어야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