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풀이] KBS '역사스페셜' 4년半 진행 유인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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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소홀히 보면 안됩니다. 숙종 때 남인과 서인이 싸우다가 서인이 득세한 뒤엔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서 권력 싸움을 벌였어요. 요즘 정치판과 크게 다르지 않죠? 오늘의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수 있게 역사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난 4년 반 동안 KBS의 '역사스페셜'을 진행해온 연극인이자 탤런트 유인촌(52)씨의 말에선 섭섭함 이상이 묻어난다.

'역사스페셜'은 1998년 10월부터 매주 토요일 저녁 시청자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이끌어준 대표적 교양 프로그램. 매니어들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모았지만 프로그램 개편을 이유로 내일 전격적으로 그 막을 내린다.

마지막 회인 '특별기획 2부작 이순신'까지 총 2백1회가 방송된 '역사스페셜'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졌던 역사적 사실을 파헤쳐 시청자들과 역사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좁혀줬다.

5백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은 과연 어디였을까, 1천3백년 전 신라인들은 어떻게 눈에도 보이지 않는 0.3㎜ 크기의 금알갱이를 이어붙일 수 있었을까….

제작진은 이처럼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대고 자료 수집, 현장답사 과정 등을 통해 조각조각 얻어낸 답변들을 마치 퍼즐 맞추듯 이어붙여 하나의 그림(프로그램)으로 완성해내곤 했다.

유씨는 "일반 프로를 진행하는 것에 비해 몇배나 어려웠지만 '1차 시청자'가 되는 즐거움이 더욱 컸다"고 말한다. 매주 대본을 받고 녹화를 하는 작업은 단순히 방송 제작과정의 일부가 아니라 유씨에겐 어려운 역사를 조금씩 알아가는 배움의 기쁨을 맛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역사를 누구나 알기 쉬운 형태로 만들어 보여주자는 게 '역사스페셜'의 취지였잖아요. 그러자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저부터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해야 했죠."

한 주분의 녹화를 마치면 다음 주 주제를 미리 들은 뒤 그야말로 고3 학생이 입시 준비하는 기분으로 공부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난생 처음 듣는 인명과 지명, 유물의 이름들이 줄줄이 적힌 대본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 전달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국내 처음으로 도입했던 가상 스튜디오 역시 극복해야할 대상 중 하나였다. 일명 '드림 스튜디오'라고 불리는 가상 스튜디오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입체적인 무대장치를 만들어낸 것.

이를 활용해 때로는 고분의 내부를, 때로는 민가나 궁궐의 모습을 복원해냄으로써 진행자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역사를 생생하게 해설할 수 있도록 했다.

"TV 화면엔 제가 탑과 탑 사이를 거닐며 진행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빈 공간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연기를 한 것입니다. 이 장면을 녹화했다가 나중에 컴퓨터 그래픽 화면과 합성을 하죠. 저처럼 연극배우가 아니면 불가능했지 싶습니다"

첫 시도이다 보니 초창기엔 한 회분 녹화를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고 각종 방송 관련 상을 휩쓸면서 그간의 고생은 보람으로 돌아온 지 오래다.

"개인적으론 안동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의 편지를 다룬 경우처럼 역사 속 무명씨를 다뤘던 프로그램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과거의 인물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 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구나,역사는 결국 반복되는구나 라는 것을 느끼며 놀랄 때가 많았죠."

'역사스페셜'은 이제 우리 방송사의 뒤켠으로 사라진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정의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역사가 지나간 시간 속에만 머문다고 여기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러 격려하고 더러는 준엄히 질책하는 역사의 교훈을 전해 줄 '특별한 프로'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신예리 기자

*** 역사스페셜을 빛낸 수상자들

▶조선판 사랑과 영혼-400년 전의 편지(98년 12월 12일 방송, 연출 장영주)=방송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새롭게 밝혀지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99년 4월 3일 방송, 연출 우종택)='보리방송문화상' 대상

▶밀레니엄특집 4회 연속기획 대고구려(2000년 1월1~29일까지 4회 방송, 연출 우종택.문형렬.허진)=방송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올해의 좋은 프로그램' 최우수상

▶한국의 폼페이 풍납토성 지하 4m의 비밀(2000년 3월 11일 방송, 연출 장영주)='한국방송대상' 작품상

▶KBS 신년스페셜 고선지 1.2편(2001년 1월 6.7일 방송, 연출 장영주)=방송위원회 '프로그램 기획상'

▶0.3㎜의 예술, 감은사 사리함의 비밀(2001년 6월 2일 방송, 연출 신재국)=방송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올해의 좋은 프로그램' 대상

▶한민족 특별기획 북한문화유산시리즈 8부작(2001년 10월 6일~12월29일까지 8회 방송, 연출 우종택.신재국.김영선)='한국방송프로듀서상' TV 작품상

▶역사발굴! 어느 임란포로의 비밀편지(2003년 2월 15일 방송, 연출 이호경)=방송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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