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생각지도

썩은 내 나는 이념의 입을 닫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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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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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온 나라에 냄새가 진동한다. 시대착오적인 이념의 쉰내다. 악취(惡臭)에 구취(口臭)까지 더했다. 자기 속셈, 자파 이익에 따라 부러 풍기는 역겨운 입 냄새다.

 자다가 봉창도 아니고 한밤중 홍두깨도 아닌 ‘공산주의’ 논쟁이 우선 그렇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노무현은 변형된 공산주의자”라는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확신과 주장은 군내가 난다. 그대로라면 이 땅의 백성들은 한 명의 공산주의자 대통령과 한 명의 유력한 공산주의자 대통령 후보를 가졌었다. 이들을 찍은 유권자들은 공산주의자 또는 공산주의 찬미자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자인줄도 모르고 지지한 바보가 됐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건 그의 생각이고 믿음인 까닭이다. 그걸 넘어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자”고 나선다면 그때 비로소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를 불러내는 건 야당 의원들이다. 과거 발언을 미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자꾸 물으니 같은 대답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그를 ‘고카시’니 ‘고벨스’니 부르며 비난하는 건 억지스럽다. 사상의 자유가 있는 민주공화국에서 신념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왜 묻는지 알면서 부러지게 답하는 사람도 딱하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자꾸 묻는 것도 다른 의도가 있어서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매카시즘 논쟁이 진원지보다 밖에서 더욱 혹취(酷臭)가 나는 이유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공영방송을 관리·감독하는 기구의 책임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구차하다. 옹색함을 면하려면 그의 그런 생각이 공영방송의 보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했어야 했다. ‘공산주의 정권’ 아래서 그 방송사가 어땠는지를 아는 사람들의 귀에 어찌 가소롭게 들리지 않겠나 말이다.

 때아닌, 그래서 기막힌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에도 썩은 내가 난다. 많은 현행 교과서들의 현대사 기술에 문제가 많은 건 분명하다. 섣부른 진영논리가 곳곳에서 너덜너덜 비린내를 풍긴다.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와 건국 대통령을 필요 이상으로 폄훼하고 비하하고, 김일성의 항일무장 투쟁과 북한의 주체사상은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지적도 틀린 게 아니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그런 교과서를 배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렇다고 국정교과서에서 해법을 찾는 이들에게선 구린내가 물씬 풍긴다. 시대에 역행하고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그렇다 쳐도 어찌 국정교과서가 홀로 옳을 수 있다고 자신한단 말인가. 대통령이 임명한 거수기들이 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뽑는 걸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가르쳤던 게 1974년 나온 이 나라의 첫 국정 국사교과서였다. 벌써 잊었다면 치매를 의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청와대의 선창에 집권당의 최고위원들이 한목소리로 ‘국정화’를 복창하고 있는 건 냄새 나는 다른 셈법 때문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해결책을 모두 건너뛴 채 극단적 처방을 해놓고 ‘통합교과서’라는 속 훤한 꼼수로 포장하는 게 설명이 안 된다. 정녕 자신들이 영구집권할 거라 자신하는 건가. 생각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가장 먼저 교과서를 바꿀 유혹에 사로잡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그때는 또 검정제로 바꿔야 한다고 외치겠다는 건가 뭔가.

 이 모든 게 자기들만 옳다는 빛바랜 이념에 집착한 결과다. 그래야만 유권자들을 속여 선거에서 득을 볼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여건 야건 뿌려대는 그런 싸구려 향수 냄새에 벌써부터 지친다. 노벨상의 계절에 노벨상 수상자의 경고가 그들의 썩은 내 나는 이념의 입을 닫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문학상을 수상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소설 『수용소 군도』에서 한 말이다. “이념은 악행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연적인 확고함과 결단력을 제공한다.” 입을 열려면 냄새 걱정 좀 하면서 열란 얘기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