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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박기 걷어내야 노동개혁 가능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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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겸
고용노동선임기자

▶대학등록금 매년 540만원 감면 ▶최저임금 시간당 1만4400원으로 인상 ▶2017년까지 에너지 요금 동결 ▶맞벌이 부부의 3~4세 아동에게 주당 25시간 무상보육 ▶노동자 2400만 명 감세 ▶계약직 제한…. 다시 봐도 귀가 솔깃한 제안이다. 실현 가능하다면 말이다. 한국 여야 정치권의 대선이나 총선 공약과 흡사하다. 영국 노동당이 지난 총선에서 내놓은 공약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보수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보수당은 세액공제나 대학지원을 축소하겠다는 긴축방안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그러곤 집권하자마자 재정흑자를 강제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공공부문 노조의 파업을 제한하는 등 시장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세수 결손과 지지부진한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속이 타는 한국으로선 꿈같은 일이다.

 개혁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 그런데도 영국 국민이 보수당에 한 표를 던진 이유가 뭘까. 지난달 26일 고용시장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댄 핀(Dan Finn) 포츠머스대 교수로부터 그 답을 짐작하게 하는 말을 들었다. 영국 맨체스터시청 타운홀에서 열린 제11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지역경제고용개발(LEED) 포럼에서다. ‘경제는 고용에서 출발한다’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일종의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포럼이다. 그는 “시장이 유연(flexible)한데 정부가 딱딱하게 (고용정책을) 운영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기영합식 공공의 개입이 확대되면 국가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한순간의 공약(空約)으로 빚어지는 참사 대신 모두가 배려하며 사는 길을 택했다는 얘기다. 노동시장 개혁도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되고 있다. 댄 핀 교수는 “실직자에게 과도한 보조금을 주지 않는다. 18세 미만은 무조건 직업훈련을 받아야 한다. 국가는 이런 걸 지원하면서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걸 걷어내는 데 힘쓴다.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일하는, 일하려는 사람이다”고 했다.

 2000년대 들어 경제를 보는 눈이 사람으로 옮겨졌다.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경제가 산다는 단순 논리가 경제·경영학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OECD를 비롯한 국제기구는 일자리 관련 프로그램을 글로벌 프로젝트의 맨 위쪽에 놓고 있다. 각국 정부의 정책은 고용률과 연동되고, 기업의 투자도 일자리와 연계해서 이뤄진다. 시혜성 정책은 갈수록 줄어든다. 설령 지원을 해도 반드시 ‘요구(의무)’가 뒤따른다. 하르츠 개혁 같은 선진국의 노동개혁은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심지어 주력 산업의 개념도 바뀌고 있다. 정보기술(IT)에 방점을 찍다 제조업을 중시하는 쪽으로 서서히 이동 중이다. IT 분야는 경기가 나아져도 일자리는 크게 늘지 않는다. 기술의 생명주기도 짧다. 그래서 고용상황은 들쭉날쭉하고, 장기고용엔 한계가 있다. 고용 없는 성장이란 말은 IT 전성시대가 되면서 나왔다. 반면 제조업은 한번 궤도에 오르면 오래간다. 미국이나 일본이 외국에 나간 기업을 복귀시키려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을 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독일이 제조업과 제조업 근로자의 경쟁력 강화에 중점을 두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어떤가. 제조업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기업은 투자를 머뭇거린다. 정부의 각종 일자리 정책은 지원금 위주다.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빼먹으면 그만이다. 노동계는 기득권 지키기에 올인한다. 파업이나 농성은 어느새 일상화돼 시민의 관심 밖 일이 됐다. 오죽하면 ‘그들만의 떼쓰기’라는 말이 덧씌워진다. 정치권은 포퓰리즘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일부 국회의원의 ‘알박기’까지 거드니 속수무책이다.

 서로의 톱니바퀴에 함께 기름칠하는 수고를 감내하기보다 내 톱니바퀴만 돌리겠다는 이기심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이러니 이가 빠지지 않은 바퀴를 찾기 힘들다. 댄 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페널티가 확실해야 한다.” 내 것만 챙기는 스크루지나 인기영합주의자에게 자성할 기회를 주고, 그러지 않으면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얘기다. 노동시장 개혁은 거창한 경제공식보다 일하는 사람을 중시하는, 의외로 단순한 데 해법이 있다.

김기찬 논설위원 겸 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