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합의했지만 '패자의 협상' 진단 나온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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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합의엔 손익계산이 따르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선방한 데도, 미진한 데도 있다.

13일 19개 유로존 정상들이 17시간 마라톤협상 끝에 마련한 합의안을 통해 일단 ‘그렉시트(Grexit±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의 위기를 넘겼다. 그러니 어디선가 박수 소리도 들릴 법한데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모두 패자인 협상”이란 진단까지 나온다.

①표류하는 ‘EU 프로젝트’=양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던 유럽에서 연대와 통합은 필연이었다. 일명 유럽연합(EU) 프로젝트다. 정치는 물론 경제±사회 분야까지 통합 수위를 높여왔다. 여기엔 프랑스와 독일 지도자 간의 오랜 신뢰가 바탕이 됐다. 이른바 ‘독일-프랑스 모터’다.

이번엔 사실상 ‘드잡이’를 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낯을 붉혔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샤를 미셸 벨기에 총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멱살잡이 직전에 멈췄다. EU 관리들이 “이런 협상을 본 적이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다.

가장 ‘치도곤’을 당한 건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였다. 도날드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의 방에서 메르켈 총리와 올랑드 대통령과 협상을 할 때 방을 떠나지 못하도록 제지를 당하곤 했다. 한 관리는 “치프라스 총리가 사실상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다.

이 사이 잠복해 있던 독일을 위시한 북유럽과 이탈리아·스페인 등 남유럽 간의 갈등선이 드러났다. 선진국과 개도국이 대립했다. 뉴욕타임스는 “틈이 더 벌어졌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협상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에 미칠 영향이 더 문제”란 분석이 나온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017년 말까지 EU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공약한 상태다. 이번 일이 영국 여론을 부정적으로 돌려놓을 가능성이 크다. 영국 언론부터 비판적이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사설로 “혹독한 협상 과정이다. 아무리 용기 있는 사람도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 것”이라고 혹평했다. “신식민주의적 노예 상태”(영국 데일리텔레그래프)란 얘기도 나온다.

②힘 과시했지만 돈 내주는 메르켈=패전국인 독일에겐 유럽이 살 길이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이래 독일 지도자들은 유럽 통합의 건설자이자 관리자였다.

메르켈 총리는 강도 높은 개혁안을 요구했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 유로존 지도자로서의 위상과 힘을 보인 게다. 그러나 통합 기치에 반하는 그렉시트 카드를 내보였다. 이 과정에서 반독(反獨)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또 욕은 욕대로 먹으면서 독일 국민의 돈을 털어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한스 베르너 진 독일 ifo경제연구소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다른 나라의 구제 금융에 돈을 다 쓰는 바람에 국내 투자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했다.

③올랑드가 유럽의 구세주라지만=이번 협상에서 마지막까지 연대를 강조한 건 올랑드 대통령뿐이었다. 독일이 요구했던 일시적 그렉시트도 합의안에서 빠졌다. 그러나 그 이상을 얻어내진 못했다. EU 건설 당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가 마부, 독일이 말이라고 한 적이 있다. EU의 주도권을 프랑스가 쥐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번 합의안에선 그러나 결과적으로 프랑스가 마부가 아니란 걸 보여줬다.

④대가 치룬 치프라스=치프라스 총리에겐 5일 국민투표에서의 승리가 정점이었다. 1주일 만에 국민투표 전보다 훨씬 더 엄혹한 긴축안에 합의해야 했다. 빵집 영업 여부까지 EU의 지시를 받는 처지가 됐다. 반긴축이란 집권 명분을 잃은 셈이다. 더욱이 이번 합의안으로 그리스가 수십 년 장기 불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지도자로선 뼈아픈 대목이다. “그리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조개혁을 해낼 절호의 기회”란 견해도 있지만 소수설이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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