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난 척 돈 요구 '저예요' 사기 … 안 통하는 나라 없더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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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안녕? 반가워. 그런데 별로 반가운 기색이 아니군. 하긴 ‘금융사기’라는 내 이름만 들어도 다들 표정이 굳어지더구먼. 어떤 사람들은 털썩 주저앉기도 하고 막 욕을 해대기도 하고 다짜고짜 경찰한테 달려가는 사람도 봤어. 그러다 보니 난 별명도 많다네. 피싱·파밍·스미싱·큐싱·신원도용·계정탈취 등등. 워낙 유명해지다 보니 한때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나를 소재를 한 코너가 유행하기도 했지. 근데 난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처럼 허술하지 않아. 날 만나본 사람들은 잘 알 거야.

 난 무소부재(無所不在)야. 한국뿐 아니라 미국·일본·중국 등 전 세계 어디에서든 나를 만날 수 있어. 보이스피싱 사업을 2003년 대만에서 처음 했는데 짭짤하더군. 그래서 이듬해 일본, 2006년에는 한국으로 활동무대를 넓혔지. 요즘은 중국도 좋아. 고객이 많으니까 성장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중국 공안당국 추정에 따르면 2014년 중국에서의 내 매출액(피해액)이 212억위안(3조8130억원)이야. 2011년 매출액이 40억위안이니까 3년만에 5배 이상 성장한 거지. 여긴 이제 유아기나 마찬가지니까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여.

 일본도 지난해 매출액이 376억엔(3396억원)으로 전년의 259억엔보다 45% 늘었어. 일본에서는 ‘오레오레’(オレオレ) 사기’라는 또 다른 이름이 생겼어. 오레오레는 ‘저예요’라는 뜻이야.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 나는 자주 그 사람의 손자나 아들로 둔갑해서는 “저예요”라고 대화를 시작해. 그리고는 “교통사고가 나서 상대방이 크게 다쳤는데 구치소에 가지 않으려면 합의금이 필요해요. 친구를 보낼 테니 빨리 돈을 만들어서 줘요”라고 숨 넘어가는 소릴 한단 말이지. 가족이라면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갈 일 아니겠어? 당황한 나머지 우리 아들인지 아닌지 확인할 겨를도 없어. 그래서 친구라는 사람에게 선뜻 돈을 건넨단 말이지. 백발백중이야.

 그래도 역시 최고는 미국이지. 지난해 매출액이 160억 달러(17조8700억원)나 돼. 통계를 보니 내가 미국인들을 거의 2초에 한번씩 만난다고 하네. 나를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는 미국 가정이 전체의 7.5%라는군. 미국인구가 3억2000만명 정도 되니까 2400만명이 나를 만났다는 계산이 나오네. 그렇게 많이 만났나? 난 기억이 없는데. 히히. 조사기관 얘기를 엿들었더니 내가 다른 사람의 신원을 도용해서 대출을 받거나 신용카드를 만들어 쓰는 신규계정사기(New Account Fraud)에 능하다는군. 타인 명의의 기존 계정을 탈취해서 자금이체·현금인출 등을 하는 계정탈취사기(Account Takeover Fraud)도 주특기라고 해.

 그런데 최근 들어 먹고살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네. 사람들이 나와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별 수를 다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지. 영국에선 계좌를 개설하려면 사전에 인터뷰 예약을 해야 하고 평균 일주일 이상 대기해야 한다는군. 미국도 본인 신원확인에만 30~40분이 걸리는데다가 바로 통장이나 카드를 주지도 않아. 2주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임시 직불카드를 주고, 진짜 카드는 일주일에서 열흘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어. 운전면허증에 기재된 주소와 현재 거주지가 다르면 전기·가스요금 고지서를 내놓으라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있어. 계좌에 어느 정도의 잔액이 없으면 계좌유지 수수료를 부과하기도 하고. 미국이나 독일은 계좌이체를 해도 다음날 이후에 돈이 이체가 돼. 나 원 참.

 그래서 나는 한국이 좋아. 계좌개설이나 자금이체, 인출이 모두 굉장히 편리하지. 지난해 매출액도 2165억원이나 되니까 큰 시장이기도 해. 한국에서도 날 막아보겠다고 이런 저런 꼼수들을 내놓고 있긴 하지만 난 별로 걱정 안 해. 최근에도 한국 금융당국이 내 ‘절친’인 대포통장을 없애려고 갖은 수를 다 썼는데 내가 멋지게 빠져나갔어. 대포통장이 없으면 통장 있는 사람을 잘 구워삶으면 되거든. ‘대포인출’을 한 셈이지. 3월쯤이었던가. 길 가던 사람에게 “당신 계좌에 돈이 얼마 들어올 텐데 대신 인출해주면 수고비를 주겠다”고 접근했지. 수고비가 탐 났던지 선뜻 해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보이스피싱 신공을 발휘해서 그 계좌에 5000만원을 입금시켜놓고 대신 인출해달라고 했지. 돈을 인출해서 건네주길래 “고맙소” 한 마디 하고는 줄행랑을 놓았지 뭔가. 황망해하던 표정이 얼마나 재미나던지.

 나는 이렇게 끝없이 진화하는데 대책이랍시고 책상머리에서 몇 개 내놓는다고 해서 나를 없앨 수 있을 것 같아? 특히 한국은 핀테크라는 걸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창구에 가지 않고도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인터넷전문은행도 만든다고 해. 내 사업 전망이 더욱 밝아진다는 얘기지. 무엇보다도 내가 믿는 건 한국의 금융소비자들이야. 오랫동안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어서지. 그 편리함을 쉽게 내던질 수 있을까. 계좌 하나 만드는데 일주일 걸린다고 해봐. 당장 난리가 날 거야. 날 만나기 싫다면 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선택은 한국인들의 몫이야.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와 절교할지, 날 만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편리함을 계속 추구할지는 스스로가 결정하는 거야. 잘들 생각해봐. 그럼 잘 지내고 조만간 또 만나. 안녕!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이 기사는 금융감독원의 자료를 토대로 ‘금융사기’를 화자로 내세워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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