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인생·정치관…UPI - 마지막 회견|"언제 감옥에 갈지몰라 항상 밥많이 먹어뒀다"|"좋은나라가 되는건 물질적 풍요만으론 안된다"|천성은 게으르나 일 시작하면 주부된 기분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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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억의 인구를 16년간 통치한 고 「인디라·간디」수상은 많은 인도인들로부터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은 「의지의 여인」이었다.
항상 도전과 위험속에서 살면서도 두려움을 갖거나 비겁함을 보이지 않은 「간디」수상은 지난 10욀중순 3일간에 걸친 UPI통신「실바나·프아」기자와의 생애마지막 회견에서 그녀의 인생관·정치관·직업관등을 털어놓았다. <편집자 주>
7억인구를 통치하면서 매일 도전속에서 살아온「간디」수상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많은 인도에 닥친 고난에 대처할 때는 가끔 자신이 동화의 나라에 나오는한 소녀처럼 느껴졌다고 표현했다.
붉은 벽돌의 의회건물에 있는 검소한 그녀의 사무실에서 기자를 맞은 그는 의자에 기대면서 『나의·입무는 끝이 없다』고 말하고 『어떤위기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항상 또다른 문제가 생긴다. 이런 문제에 관한한 동화속의 나라에 나오는 소녀같이 뛰어도 뛰어도 같은자리에 머문다』고 했다.
「간디」수상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인디라지』라는 애칭으로 즐겨 부른다. 그러나 적들은 「간디」블 경멸한다.
「간디」수상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평상시에 오픈카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볼수있듯이 결코 두려움을 갖지않습니다. 난 자주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지요. 어떤 사람은 나에게 총을 들이대는가 하면 델리에서는 칼을 던지더군요. 특히 선거철에는 병세례를 받기 일쑤지요』라고 털어놨다.
『우리는 경제개발과 식량증산을 통해 국민들을 아사 지경으로부터 구해낼수 있었읍니다. 우리는 아직 재난에 부딪쳐있고 할일이 많습니다.』「간디」수상은 아버지 「네루」의 추억에 대해서도 몇가지 지난날의 기억을 들려주였다. 『한창 대영독립투쟁을 벌일때 아버지와 나는 언제 경찰에 붙잡혀 갈지몰라 아침식사는 되도록 많이먹었지요. 그래야 감옥에 가더라도 속이 든든하거든요.
나는 그때 어린 소녀였는데 나무에 올라가기를 좋아했읍니다. 책을 들고 나무위에 올라가 있으면 누구 눈에 띄지도 않고 책을 끝까지 다 읽을수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부끄러움도 많이 탔지만 「마하트마·간디」가 우리집에 찾아올때면 부끄러움을 잊었어요.』
그녀는 비행기안에서드 보좌관들이 메모를 건네주고 귀에 무언가 일러주는 와중에서도 시간을 쪼개 일하고있었다.
『나는 조국이 보다 좋은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좋은나라는 물질적 풍요나 생활수준의 향상만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과학과 학문의발전을 토대로 보다 좋은 국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이를 바탕으로 보다 나은세계를 이룩하는 것이다. 설령 다른 나라들이 그렇게못하더라도 인도만은 최선을다해야 한다』
「간디」는 그녀의 오랜 정치역정에 대해 다분히 철학적인 논평을 했다.
『인생은 선과 악, 양지와 음지, 행복과 고통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배웠다. 나는 악과 비리와 싸워야한다는 소명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투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소명을 다할뿐이다』라고.
정원가꾸기를 좋아하고「베토벤」과 「바하」를 즐겨듣던「간디」의 트레이드마크는 인도특유의 복장인 사리와 남자용 손망시계다. 큰 시계를차고 다니는것은 안경을 쓰지않고도 시간을 볼수있도록 하기위해서다.
「간디」는 카리스마적 이미지와는 달리 선동적 구호나 거창한 행사들을 즐기지않았으며 시간낭비를 극도로싫어해 철저히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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