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김보성의 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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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다. 이달에 어울릴 만한 인물을 찾으려 지난해 사진 폴더를 찾아봤다. [20140606 김보성] 폴더를 보자마자 ‘의리’가 떠올랐다. 다른 폴더를 볼 것도 없이 뒷담화의 주인공으로 김보성을 정했다.

배우 김보성의 인터뷰, 하필 법정공휴일인 현충일이었다. 더구나 금요일이었다. 모처럼의 연휴 나들이 구상중이었다. 그런데 꼭 그날이어야 한다고 했다.

취재기자가 장소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이라 통보했다. 시큰둥하게 왜 그곳이냐고 물었다. 차 막히고 사람 북적거릴 게 뻔했다. 하필 그날, 그곳이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호국영령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현충원에서 만나야 한다고 하네요.”
답을 듣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사실, 웃을 일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내겐 태극기 걸고 하루 쉬면 되는 날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호국영령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현충원에서 만나야 한다’는 얘기에 속없이 웃음이 나버렸다.

현충일의 현충원, TV에서 보기만 했지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다. 김보성을 핑계삼아 한번 가보고 싶은 맘이 들었다. 그곳에서 보자고 약속을 했다.

가본적 없기에 상황을 판단하려 미리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복잡했다.
30도가 넘는 날씨에 햇볕을 가릴 만한 곳은 이미 인산인해다. 인적 드물고 사진 배경으로 합당한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잠깐 둘러보는 데도 온몸이 땀범벅 되는 유월의 땡볕,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김보성이 멀리서도 한눈에 띄었다. 100여 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이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홀로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인사를 나눴다.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도 땀범벅인데 검은 정장 차림에 검은 넥타이를 갖춰 입은 참배 복장, 비 오듯 땀이 흐르고 있었다.

“덥지 않으십니까?” 안쓰러워 물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며 호쾌하게 웃는다.

“혹시 흑채 사용하십니까?”
“어! 어떻게 아십니까?”라며 화들짝 놀란다.

“땀에 번져서 이마가 엉망이네요. 닦아내고 사진 찍어야 할 거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얼른 정리하고 오겠습니다”며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다녀 온 그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쑥스럽게 웃는다.
그 웃음이 참 묘했다.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순박한 웃음인데 묘하게도 이 사람에겐 어울린다.

사진을 찍으려 나섰다. 광장을 가로질러야 했다. 나서자마자 한 꼬마가 달려왔다. 그 꼬마가 "의~리"라 말하며 특유의 액션을 취하자 그도 즉시 그 특유의 ‘으으~리’로 응답했다.
뒤따라온 부모가 기념 촬영을 부탁했다. 흔쾌히 응해줬다.

그 다음부터 사달이 났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죄다 기념사진 찍자며 ‘의리’를 외친다. 할머니·할아버지·아주머니·아저씨·학생·꼬맹이 죄다 ‘의리’다.

그는 다 응해준다.
아마도 ‘의리’를 외친 게 수십 번이다.
매니저도 없이 혼자 나타났으니 이 상황을 정리해 줄 사람도 없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또 땀범벅이다. 그냥 뒀다가는 그나마 정리한 얼굴이 또 엉망이 될 게 뻔했다. 낭패였다.
근처를 둘러봤다.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20여 미터 떨어져 태극기를 빼곡하게 매달은 나무 조형물이 보였다. 사진배경으로 옳거니 싶었다.

미리 물색해 둔 장소는 포기해야 했다. 게까지 가다가는 ‘의리’만 외치다 끝날 것 같았다.
팔짱을 꼈다. 거의 끌다시피 인파 속에서 그를 데리고 나왔다.

이끌려 나오며 그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연신 머리를 숙인다. 그는 죄송할 게 아닌 일에 죄송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다.

우여곡절 끝에 그를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런데 첫 컷을 찍기도 전에 한 아주머니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사진촬영중이라 해도 막무가내다. 기념사진 찍어야 한다고 우기는 아주머니를 겨우 설득하여 다시 사진 촬영.

두어 컷 찍었더니 또 다른 사람이 달려든다.
그런데 이 사람, 거부를 못한다. 다 받아준다. 난감한 상황이다.

급기야 취재기자가 나섰다. 난데없이 매니저 역할을 하며 달려드는 사람을 통제했다.
통제를 해도 아랑곳없이 달려드는 사람, 지나치며 ‘의리’를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 부랴부랴 촬영을 마쳤다.

인파를 뒤로하고 현충원을 나서며 나도 모르게 ‘의리’라 외치며 인사를 건넸다. 그도 내게 ‘의리’라 답했다.

조금 전까지 지긋지긋했던 이놈의 ‘의리’, 저절로 그 ‘의리’가 내 입에서 나왔다. 이건 뭘까? 그새 중독되었나 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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