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묘덕스님 아홉 번 덖음차의 비밀

중앙일보

입력

오늘 곡우입니다. 곡우 즈음의 우전차(雨前茶)를 필두로 본격적인 차 철이 시작됩니다. 차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눈코 뜰 새 없는 시기가 된 겁니다. 며칠 전 묘덕스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합니다. 올 겨울 따뜻했기에 찻잎이 유난히 일찍 올라왔다 합니다.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마음이 들떠 있음이 전해져 옵니다.

이태 전, 고창 선운사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서정태 시인과 독자의 만남 자리였습니다. 그 많은 독자들에게 차를 내어 주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도 많으니 차를 마시는 격식 따질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얼레벌레 한 잔 얻어 마셨습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엉겁결에 서서 마신 차, 맛은 각별했습니다.

아홉 번 덖은 차라 했습니다. 흔히 차를 '구증구포(九蒸九曝)'하여 만든다는 말은 들었지만 본바 없었습니다. 이에 관한 별별 논란이 심심찮게 있은 터라 미심쩍었습니다. 별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습니다. 차 만드는 전 과정을 보여 줄 터이니 피아골로 한번 다녀가라 합니다. 사실 듣기만 했을 뿐, 본바 없어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얼레벌레 마신 차 한 잔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그만 1박2일의 일정을 약속해버렸습니다.

상춘객 몰려드는 연휴의 교통체증을 피하려 이른 새벽부터 차를 몰았습니다. 아침 햇살을 받은 햇 찻잎을 보고 싶기도 했기에 서둘렀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피아골, 만만찮은 거리가 아닙니다. 가는 길 내내 헛걸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피아골 입구부터 입하의 신록이 싱그럽습니다. 연초록의 피아골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길 잘했다 싶습니다. 신록 우거진 숲속 차나무는 오히려 볼 품 없습니다. 사철 푸르다지만 마르고 병든 잎투성이 입니다. 더구나 신록 속에 묻혀 있으니 푸르기보다 거무스레합니다.

거무스레한 차나무에 오른 새 움, 이놈을 보려고 일찍부터 달려왔습니다. 연두 빛 오롯한 여린 잎, 아침 햇살에 속살마저 비칩니다. 묘덕스님이 그 햇 움을 엄지와 검지의 손톱으로 톡 따냅니다.
“방장부절(方長不折)이지요. 채 피기도 전에 부러지는 아픔을 위해 헌시를 한편 올려야 할까 봅니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방장부절의 아픔을 위로하는데서 차를 만드는 일이 비롯된다는 것을….

낮 동안 찻잎을 따고 땅거미가 내려앉자 차 솥에 불을 넣습니다. 입하라지만 산 속이니 쌀쌀합니다. 한기가 속을 파고듭니다. 자연히 불 들어가는 차 솥 옆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열이 오릅니다. 몸은 서서히 솥에서 멀어집니다.

묘덕스님이 장갑을 낍니다. 무려 목장갑 다섯 장을 낍니다. 혼자서는 낄 수 없습니다. 거드는 이가 온 힘을 다해 겨우 끼워 넣습니다. 장갑 끼는 일조차 만만치 않습니다. 솥에 물을 붓습니다. 쇠붙이 담금질하는 것 마냥 치익 소리가 나며 김이 확 오릅니다. 행주로 단지를 닦아냅니다.

적정 온도가 되기를 기다립니다. 가끔 솥에 물을 붓습니다. 이내 치익 소리와 함께 김으로 증 합니다. 온도가 오를수록 사나운 소리를 냅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다시 물을 붓습니다. 물이 윙윙 소리를 내며 솥에서 빙빙 돕니다. 기포도 김도 나지 않습니다. 수은처럼 동글동글 뭉쳐 윙윙 돌더니 서서히 사라집니다. 희한한 광경입니다. 거의 400℃라 합니다. 비현실 같은 현실이 시작되는 시점, 이제 때가 되었다 합니다.

찻잎을 솥에 붓습니다. 첫 덖음의 시작입니다. 재빠른 뒤집기와 털기의 반복입니다. 이내 김이 오르고 풋내가 퍼져 오릅니다. 연신 “아후, 아후” 소리를 내는 스님의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어느새 얼굴은 땀범벅입니다. 타지 않게 재빨리 꺼내어 찻잎을 치댑니다.
“솥단지 면에 찻잎 하나하나가 떨어지도록 뒤집고 털기를 빠르게 해 주어야 합니다. 게 중 하나라도 불을 먹지 않은 게 있다면 차 맛을 그르치게 됩니다.”

치대고 식힌 후, 두 번째 덖음. 어김없이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400℃의 뜨거운 열기와의 싸움, 차라리 고통입니다.
“제살이 다 되어 분명 죽었음을 확인하고 꺼내어 세게 디뎠는데도 찬바람 쐬어주면 금방 되살아납니다. 모진 생명력이죠.”

그리고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과정의 반복이 이어집니다. 과정이 반복될수록 향과 색이 달라집니다. 과정마다 냄새를 맡아 보라 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때 마다 냄새가 다릅니다.
“아직 담뱃진 내가 남아 있지요?”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던 그 냄새가 담뱃진 내와 흡사했습니다.

일곱 번째 덖고 나서는 찻잎을 치대지 않습니다. 한지를 깐 대소쿠리에 올려 식힙니다. 또 냄새를 맡아 보라 했습니다.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담뱃진 내는 온데간데없고 구수합니다.
“모든 과정마다 색과 향을 살핍니다. 그래야 차의 오롯한 기운이 담긴 맛, 향 ,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덟 번째, 솥으로 떨어지는 찻잎에서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납니다. 차를 덖어낸 묘덕스님 얼굴이 서리가 내린 듯 하얗습니다. 검은 눈썹마저 백미(白眉)가 되었습니다. 덖을 때 날리는 솜털가루들이 차곡차곡 쌓여 그리 된 것입니다. 그제야 웃습니다. 400℃의 무쇠 솥을 끌어안고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인내한 후의 웃음입니다.

그날의 작업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사흘간 숙성 후, 아홉 번째 불을 먹인다 합니다. 그래야 오롯한 차의 향이 배어든다 합니다. 차를 덖는다는 건 고행이자 수행임을 지켜보았습니다.

여덟 번 덖었지만 맛이나 보자며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식히지 않고 그냥 붓습니다. 흔히 적정 온도로 식힌 물로 차를 우려내는 다도와 다릅니다.
“아홉 번 덖어 제살을 제대로 한 차는 뜨거운 물로 우려도 떫은맛이 나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단호합니다. 끓는 물을 사정없이 붓는 자신감, 수많은 세월 동안 인고를 감내하고 검증한데서 나오는 것일 겁니다.

여덟 번의 덖음을 겪어 쑥색으로 쪼그라든 찻잎이 일창이기(一槍二旗)의 잎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도 덖고 디뎠건만 모양, 색, 향이 오롯이 살아납니다. 선운사에서 엉겁결에 얻어 마셨던 차 한 잔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리도 고통스럽게 만든 차를 그 많은 이들에게 그냥 건넨 겁니다.

다시 차 철입니다. 묘덕스님은 고행 길로 다시 들어서면서도 들뜬 목소리로 찻잎을 만나러 간다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여태 사진으로 찍지 못한 아홉 번째의 덖음, 이번 철엔 찍어야겠습니다.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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