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연애는 죽고 사는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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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헌씨가 힘을 바짝 낸 게 분명하다. 2013년 자전적 이야기 ‘힘내세요, 병헌씨’(이하 ‘병헌씨’)로 데뷔한 이병헌(35) 감독이 2년 만에 두 번째 영화 ‘스물’로 돌아왔다. 드디어 상업영화다. 이 감독은 ‘병헌씨’에서 서른 살 영화감독 지망생 병헌의 상업영화 데뷔 실패기를 ‘웃프게’ 그렸다.
‘스물’은 한층 젊어지고 밝아졌다. 찌질하지만 사랑스런 인물과 웃음을 연발하게 하는 대사, 따뜻한 결말은 여전하다. 호랑이 기운이 솟는 병헌씨를 만나본다.

-데뷔작 ‘병헌씨’는 서른 살 남자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 작품에서 나이가 10년 정도 젊어졌는데.

“‘병헌씨’ 프리퀄일까(웃음)? 사실 ‘스물’의 초고는 10년 전에 썼다. 묵혀 놓았던 건데 뒤늦게 빛을 본 거다. 스물은 재미있는 나이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다. 술집엔 들어갈 순 있는데 술값이 없는 나이랄까. 어른이 되기 전 1년간 머무는, 말하자면 ‘중천’(이승과 저승의 중간 세계) 같다. 그때 벌어지는 어설픈 에피소드와 고민을 그리다 보면 공감도 얻고 추억도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또 까불거리며 뛰어 놀아도 용서되는 나이가 스물이다. 훨씬 재밌는 코미디를 할 수 있다.”

-20대 중반에 초고를 썼는데 어느새 30대 중반이 됐다. 그 사이 많이 변하지 않았나.

“맞다. 그래서 각색하기 전에 20대 초·중반 친구들을 만나 얘기를 많이 나눴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차이가 나나?’ 싶을 정도로 내 정서와 너무 멀더라. 자기들끼리 주고 받는 성(性)적 농담도 훨씬 세고, 암수 구분 없이 노는 데 놀랐다. 이 감성으로 영화를 만들면 진짜 그들만을 위한 영화밖에 안 되겠더라. 나는 10~20대뿐만 아니라 30~40대에게도 자신의 스무 살을 추억할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시대에 대한 복고는 아니지만 세대에 대한 복고를 만들고 싶었다. 취재한 것을 다 버리고 내 정서로 가기로 했다.”

-그래도 2015년 스무 살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살릴지 고민했을 것 같다.

“1990년대든 2000년대든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다를 뿐 고민은 비슷한 것 같다. 등록금 문제나 진로 같은. 그리고 사랑. 연애는 20대 전반을 아우르는 고민이다. 30대쯤 되면 정리되지 않나. 연애하기 싫어지고.”

-주인공들이 연애를 통해 성장한다.

“잘 생각해보면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하고 고되게 고민하는 게 연애다. 여자 때문에 전쟁도 일어나지 않나. 그중 스무 살의 사랑엔 풋풋하고 설레는 게 있다. 하다 보면 상처가 되고, 그게 또 다른 시작점이 된다. 그래서 ‘스물’은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연애는 그들에게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목표 없이 잉여처럼 사는 치호(김우빈), 대기업 입사를 위해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경재(강하늘), 가난과 싸우는 알바족 동우(이준호). 세 친구는 지금 20대를 아우른다.

“모든 남자들의 분신이다. 직접 겪어봤거나 간접적으로 주변에서 본 에피소드일 거다. 실제 동우와 경재는 이름까지 내 친구에게서 따왔다. 셋이 정말 친했는데 가는 길이 달랐다. 경재는 영화처럼 명문대 들어가서 대기업 입사를 꿈꿨는데 지금은 장교가 됐고, 동우는 큰아버지 일을 물려받는 중이다.”

-그럼 치호가 감독 자신인가.

“초고를 쓸 땐 그렇게 잡았다. 사실 나는 20대에 저 밑바닥에서 버라이어티한 생활을 했다. 군대를 먼저 다녀와서 치호처럼 할 일 없이 빈둥거렸는데 아버지가 대학 졸업장을 따오면 카드 빚을 갚아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보다 야구장에 더 많이 갔다. 내가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늘 암담했던 것 같다. 술 먹고 고민만 하다가 우연히 시나리오 공모전을 보고 지원했고, 그 때 꿈을 찾은거다.”

-우연히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가능한가.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야설이나 연애 편지를 많이 썼다. 어차피 시간이 남아 돌아서 써 본건데 재미 들렸다. 스물일곱 살부터 3년 동안 열 편 넘게 썼다. 그중 영화화된 게 ‘네버엔딩 스토리’(2012, 정용주 감독) ‘오늘의 연애’(1월 14일 개봉, 박진표 감독) ‘스물’ 같은 작품이다(이 감독은 강형철 감독의 ‘과속스캔들’(2008) ‘써니’(2011) ‘타짜-신의 손’(2014)의 각색을 맡기도 했다). 글을 쓰다 보니 연출 욕심이 생기더라. 진로를 정하는 데 20대를 온전히 다 쓴 셈이다.”

-‘스물’은 굉장히 밝다. 요즘 청춘이 밝지만은 않은데.

“어둡게 가면 정말 끝도 없이 어두워지는 게 스물이란 나이다. 사회 문제를 다룰 수도 있고. 나는 노선을 처음부터 밝게 잡았다. 상업영화이고, ‘병헌씨’보다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고 싶었다.”

-김우빈·강하늘·이준호 캐스팅이 탁월했다.

“세 배역의 성격이 분명했기 때문에 거기에 딱 어울리는 배우를 섭외하고 싶었다. 말도 안되게 운이 좋았다. 시나리오의 힘일까? 배우들도 이제 까불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연기 지도도 거의 하지 않았다. 생활 속에 묻어 있는 자기 것을 꺼내주길 기대했다. 정말 잘해줬다.”

-김우빈은 낯을 가리는 편이라던데 코미디를 잘하더라.

“낯을 가리는데 며칠 안 간다. 놀기 시작하면 정말 아우, 대단하다. 셋 중에 제일 재밌을 거다. 나를 닮아서(웃음).”

-스스로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하나.

“과묵한데 농담하는 걸 좋아한다. 말 없던 사람이 가끔 농담을 툭 던지니까 뼈가 있는 줄 알고 많이 오해하더라.”

-코미디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뭐가 재미있고 재미없는 타이밍인지, 무슨 단어를 써야 신선한지는 알 것 같다. 다만 대중의 코드와 내 코드가 통하는지 늘 고민한다. 개그·예능 프로그램을 거의 다 챙겨본다. 내 코미디 스타일은 ‘반전 개그’. 엄청 뻔히 가는 듯하다가 뒤에 살짝 비틀어줘서 새롭게 보이게 하는, 일종의 사기(웃음)?”

-무게 잡는 척하다가 꼭 반전 대사가 나온다. 예를 들면 꿈을 포기한 동우가 울먹이다가 “그런데, 눈물이 안 나온다”라고 말하는 장면, 정말 배꼽 잡고 웃었다.

“그런 게 웃기려는 장치도 되지만,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신선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찌 보면 자기 계발서에서 진부하게 나오던 거다. 나는 그 얘기를 또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뭔가 환기를 ‘띵’ 시켜준 뒤 다음 대사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좋은 기술인 것 같다.”

-여자 캐릭터가 아쉬웠다. 남자 캐릭터에 비해 생동감이 떨어지더라.

“맞다. 배우들은 모자람이 없었는데 이야기의 짜임새 면에서 부족했다. 자책을 했다. 조금 더 설명해줘야 했는데 남자 캐릭터에 너무 신경 쓰느라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 정도 포기한 부분이 있다. 역량 부족이다.”

-‘길을 잘못 들어도 돌아갈 시간은 충분하다’라는 대사가 뻔하지만 좋더라. 스무 살 청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나.

“애초에 뭔가 말할 생각은 없었다. 선배들의 이야기가 당장 기운을 북돋아 줄 순 있겠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안 된다. 결국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다만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같이 공감하고 웃자. 잠깐이라도 힘내자. 이 정도다. 오히려 지금 내 세대가 영화를 통해 스무 살을 추억하고, 현재의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되돌아 봤으면 좋겠다.”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 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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