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노동유연성으로 선회한 유럽 경제모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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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독일과 프랑스에서 노동개혁 바람이 거세다. 독일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은 입사 2년 이하의 신규 근로자는 기업들이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도록 노동법을 바꾸기로 했다. 프랑스도 지난 9월 똑같은 내용의 '신고용계약'을 도입했다. 독일 노조는 임금 인상 없는 근로시간 연장까지 수용했다. 복지와 분배에 치중해 온 두 나라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조치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독일.프랑스가 강도 높은 노동개혁 처방을 꺼내든 것은 위기의식 때문이다. 노조를 의식한 인기영합정책을 고집하다간 자칫 일자리 자체를 잃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 나라 노조는 경기 침체와 경쟁력 약화의 주범으로 지목된 지 오래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자는 사회적 합의를 도리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독일 대연정은 정책 합의서 서문에 "최우선 정책 과제는 일자리 창출"이라고 못 박았다. 정책 합의서는 "고실업과 막대한 국가 채무, 고령화, 세계화의 압력을 이겨내려면 노동개혁을 통한 경제 체질 개선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시장을 중시하고 자유주의를 확대하는 영국.미국식 모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이에 따라 독일은 연금 지급 연령을 올리고 사회보장제도는 크게 축소했다. 대신 내년에는 임금이 동결되고 실업보험요율은 내린다. 기업들의 부담을 확 줄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집권 측은 우리나라에도 독일.프랑스식 모델을 본받자는 조류가 대세였다. 큰 정부를 내세우고 분배와 복지 확대를 우선하는 정책 기조가 뚜렷했다. 그런데 독일.프랑스는 기존 노선을 포기하고 노동개혁 쪽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그 실패한 모델을 우리는 뒤늦게 배우자고 하니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은 "프랑스의 좌우동거 정부나 독일의 대연정은 유럽 정치의 수준을 보여 준다"고 극찬한 바 있다. 그러나 연정이라는 껍데기보다 알맹이를 봐야 한다. 지역 통합은 형식에 불과하다. 노동개혁과 기업 살리기야말로 진짜 알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