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월급이 3000원 … 울산의 ‘덕수’ 이야기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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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이상달씨가 울산 정유공장에서 방독면을 쓴 채 휘발유 탱크를 점검하는 모습. [사진 이상달씨]

“울산은 제게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1963년 12월 대한석유공사에 입사해 1994년까지 30여 년간 울산 1세대 근로자로 일한 이상달(81)씨가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던진 첫마디다. 1962년 불과 8만여 명이었던 울산시 인구는 1979년엔 무려 4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크게 늘었다. 60~70년대 공장이 잇따라 들어서자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다.

 이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34년 경북 포항 구룡포에서 5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고교 졸업 후 해군에서 8년간 군생활을 했다. 해군 중사 월급 3800원으로는 가정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울산 정유공장에서 모집 공문이 떴고, 1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공채 1기로 당당히 합격했다.

 그가 처음 맡았던 업무는 파이프 점검이었다. 3교대로 야간근무를 서고 점심도 교대로 먹을 정도로 바빴지만 근무환경은 남부럽지 않았다. 이씨는 “당시 회사가 사택도 마련해주고 자녀 학자금도 지원해줘 일할 맛이 났다”고 말했다. 초봉이 3000원이었던 이씨 월급이 5개월새 5000원이나 오를 만큼 당시 울산 경제는 급성장을 거듭했다. 그는 “정유공장 작업복을 입고 가면 어디서나 외상술을 마실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어떻게든 잘 살고 싶었고 가족들도 잘 돌보고 싶었다”며 “희망을 찾아 울산에 오면서 후회없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울산박물관은 이씨의 삶을 바탕으로 당시 울산 근로자들의 생활상을 스토리 형식으로 풀어낸 ‘별 보고 출근하고 달 보고 퇴근하고-울산 공업화 1세대 이야기’ 특별전을 다음달 29일까지 연다.

울산=유명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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