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딱 제 역이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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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아이고 늦어서 미안합니다. 오늘 제가 대학에서 특강을 하느라, 근데 진짜 웃기지도 않더라고요."

1일 산울림 소극장 연습실. 인터뷰 시간에 30분가량 늦고선 설레발을 친다. 얘기를 슬쩍 돌리는 솜씨, 노련한 선수(?)임에 틀림없다.

"이번 노벨 문학상을 탄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인문학의 위기라지만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이 학교 문제 많다. 너희 인터넷만 했지 뭘 아느냐'고 막 퍼부었죠. 근데 강의 끝나고 보니 총장님이 맨 뒷자리에 앉아 계신 거 있죠. 어찌나 미안한지…."

술술 풀어내는 얘기 솜씨. 지루하지도 않고 막힘도 없다. 그래서 무대에 오르는 이야기꾼이 됐을까.

배우 윤석화(50)씨. 올해로 연극 데뷔 30년째다. 연기 인생 30년의 첫 시작(위트)에선 삭발을 감행하더니 마지막은 비운의 단종비(妃) 정순왕후(1440~1521)로 나온다. 제목은 '영영 이별 영이별'(전옥란 극본, 임영웅 연출).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을 배경으로 신세대 작가 김별아씨가 쓴 원작을 각색했다. 이 소설은 청계천 복원을 기념하기 위해 주변 지형을 소재로 쓰인 이른바 '청계천 소설'의 하나. 청계천 소설 중 첫 번째로 무대에 올려지는 셈이다.

"8월엔가 책이 나오자마자 사 보았죠. 뭉클하지만 너무 슬프지도 않고, 애틋하고 지고 지순한 사랑도 담겨 있어 좋더라고요. 언젠가 꼭 한번 해야지 다짐했는데 박정자 언니가 쿡 찌르는 거예요. '얘, 산울림에서 이번에 정순왕후 한다더라.' '어머, 나 그거 하고 싶은데. 근데 나 연말에 일본 공연 잡혀 있어' '네가 딱이야. 당장 일본 공연 연기해.' 언니가 바람잡이 역할 톡톡히 했어요."

수다스러운 인터뷰와 달리 막상 대본 연습에 들어가자 분위기는 사뭇 숙연해졌다. 한나라의 국모에서 서인으로 추락한 뒤 60여 년을 침묵으로 버텨야 했던 정순왕후를 윤씨는 담담히 그려냈다. 분노와 한으로 감정이 격랑처럼 휘몰아치는 순간엔 윤씨의 눈에도 핏발이 서렸다. 1인극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시조창과 살풀이춤도 보여준다. '목소리' '딸에게 부치는 편지'이후 13년 만에 하는 세 번째 모노드라마다.

이번 연극은 산울림 소극장 개관 20주년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임영웅 선생님이 겉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얼마나 살가운데요. 15년 전인가, 제 생일날 산울림에서 마냥 공연을 하니 저녁에 밥 먹자고 집으로 부르시는 거예요. 앞치마 두르고 녹두 빈대떡 부치시는 모습에 어찌나 감동했던지."

요즘 그녀는 세 살 된 입양 아들 수민이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바보 같지만 가장 짜릿할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엄마 누구지'라고 물을 때 '엄마 석화'라고 제 이름 부를 때에요. 정 붙이고 살다 보면 핏줄 그런 거 정말 까맣게 잊고 삽니다.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울 뿐이죠."

공연은 24일부터. 02-334-5915.

글=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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