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러시아, 한국 그리고 지식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페레스트로이카의 이론적 지주이자 고르바초프와 함께 냉전을 붕괴시킨 대사상가.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이었던 야코블레프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야코블레프는 굳이 따지자면 시모니아와는 학문적 방향성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와 민주만이 소련을 구원할 수 있다며 이 방향으로 소련을 움직였던 인물이다. 후일 고르바초프가 "개혁이 민중에게 기쁨을 주기보다는 원망을 주고 있다. 뭔가 잘못됐다는 비난이 쇄도한다"며 괴로워하자 "인민들은 자유를 얻었다. 자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강변했던 인물이다.

반면 시모니아는 자유와 민주의 확산이 소련을 구할 것이라는 점에선 같았지만 야코블레프식의 '파괴적 창조'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부류였다. 공산당의 이념 전사 예고르 리가초프처럼 완고하지는 않았지만 소련 사회를 지탱해왔던 체제의 위력과 선기능을 포기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야코블레프는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왜 개혁을 제대로 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권력 주변에서 쓸어버리지 않았느냐"며 고르바초프를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 야코블레프에게 상처를 받은 소련 지식인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꼭 그들이 공산당 골수분자여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페레스트로이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구현하자고 고르바초프를 개혁의 전선으로 밀어붙였던 그들이었다. 소련사회 내의 민주적 원칙과 시민의 자유를 확산시켜야 체제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세계가 무도한 자본과 시장의 무자비함에 경도되어 갈 때 가장 반시장적인 대응을 통해, 그래도 근대.현대의 시기에 활발하게 기능을 했던 한 대체체제의 운명을 너무나 경박하게 내친다는 자괴감과 반발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치의 장에서는 격렬한 권력쟁탈전과 연계됐고 일부 피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식계는 날카로운 이견 속에서도 냉정했다. 흥분하기보다는 대중을 읽어내고 그들에게 누가 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지를 놓고 경쟁했다. 소련 건국 때와 달리 소련 해체기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데에는 대중을 흥분시키지 않으면서도 본질적 논쟁을 시도했던 지식인들의 태도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한편 현실주의 노선을 택했던 옐친은 자유주의 극단론자들과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애국주의 세력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옐친은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지방선거와 국가두마 재선거에서 패배했다.

정치인 옐친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지만 애정이 있었다. 개혁이 러시아에 예기치 않은 눈물과 자존심의 상처를 안겨주었지만 그래도 자유와 민주의 진전, '러시아와 세계의 화해'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게 다수였다. 당시 이러한 평가를 이끌어낸 것은 좌우 양쪽의 선봉에 섰던 지식인들이었다. 위대한 인텔리겐치아의 시대를 겪었던 전통의 러시아 지식인들은 그래도 현실 정치인을 '시대의 거인'으로, '시대를 거스르지 않았던 인물'로 평가했던 것이다.

20일 아침에 만난 시모니아가 말했다. 민주주의 달성 이후의 민주사회에서 지식인과 대중, 그리고 정치지도자가 비록 '앙시앵 레짐으로의 회귀는 안 된다'는 같은 시대정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동일한 담론의 전선에 서기는 정말로 어려운 것 같다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이후의 한국에서 비슷한 질문이 던져진다면 과연 한국적 대답은 어떤 것일까.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