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긴 꼬리|해방의 기쁨속 「어제」를 잊고 있는 게 아닐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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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른바 대평양전쟁때 일본군대는 연합국측의 포로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인들을 동원하여 각지에 철도며 비행장들을 건설하였다. 이때 이들을 채찍질해가며 감시했던 것은 바로 일본군군속으로 끌려나간 한국인들이었다.
이들중의 일부는 동남아의 노무자나 연합국측 포로들의 편을 들어 「반난」을 일으켰다. 하루 4백g의 쌀과 소량의 부식만을 얻어먹으며 매일 평균 14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해야했던 이들 노무자의 생활은 생지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의료시설의 해택도 없는 상태로 이들은 한번 병이나 영양실조로 쓰러지면 그만이었다.
아픈과거 실상 몰라
이런 상황속에서 상관의 명령을 그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던 한국인 감시원들의 괴로움은 각별했을 것이다.
「반난」은 그들의 양심이 시킨 어쩔 수 없는 저항이었을 것이다. 물론 「반난」은 무참히도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종전이 되자 살아남은 한국인감시원들은 이번에는 비인도적인 포로학대가 문제되어 일본인상관들과 함께 전범자가 되어 재판을 받게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이 열대의 사형대에서 처형되고 나머지 여러 사람이 금고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 다음에 다시 일본에 이송되어 소압프린스의 옥중에 갇혔다.
이들은 B급, C급 전범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신개를 비롯한 일본인 A급전범들이 석방된 1948년 이후에도 풀려나지 않았다.
1952년에 한국인 전범 29명은 대만인전범 1명과 함께 자기네는 엄연한 한국인이라는 주장아래 석방을 요구했으나 최고 재판소는 그들이 『일본국민』이었다는 이유로 이를 각하시키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나는 일전에 우연히 일본의 책방을 뒤적이다 발견한 『적도하의 조선인반난』과 똑같은 저자가 지난해에 써낸 『조선인 B C급 전범의 기록』을 훑어보기 전까지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물론 이들 한국인 「전범」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바 없다. 아예 이런 사실을 알고있는 한국인은 별로 없으리라.
역사의식 일깨워야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일본의 전쟁책임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겠다는 의도에서 인도네시아 등을 뛰어다니며 한국인감시원들의 자취를 정열적으로 추적했던 것이다. 이 책을 책방에서 읽어가면서 마땅히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를 왜 우리가 지금까지 미뤄왔으며 왜 하필이면 일본여성의 손을 빌어서야 겨우 알게되었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가 해방된 지 38년.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게는 해방의 기쁨을 마음놓고 누릴만한 처지는 못되는 것이다. 해방 38돌을 맞아 모든 매스컴은 오늘의 한국을 자랑하고 화려한 내일을 다짐하는 각종 특집에 돈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해방을 기뻐하기에는 너무나도 성급하게 어제를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잊고싶은 과거가 있다. 그럴수록 더욱 잊어서는 안될 과거인 것이다. 오늘 속에 담긴 과거의 무게를 올바르게 저울질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내일을 제대로 내다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과거를 등진 채 우리는 내일로만 치달리려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곧잘 「역사의식」을 들먹인다.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1887년부터 1905년에 문믈 닫기까지 풍운에 찼던 대한제국의 워싱턴공사관의 역사였다. 특히나 궁금했던 것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공사관의 태극기를 내릴 때 이역에서 나라를 잃은 슬픔을 공사관의 한국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하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다시없이 중요한 연구주제 같았다. 그러나 지원을 부탁하러 간 어느 한 기관에서도 여기에 응해주지 않았다. 케케묵은 과거를 들춘다는 것이 오늘의 한국에 무슨 의의가 있겠느냐는 태도였다. 그러고 보면 한일합병을 위한 마지막 어전회의의 모습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는바가 별로 없다. 이때의 정경을 제대로 밝혀줄만한 자료가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느 한 소설가라도 나라를 빼앗기는 마지막 날을 재현시켜 볼만도 한 일이 아닐까.
해방의 날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일제 36년을 들먹인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 동안의 쓰라림을 추체험하려 하고 있는지.
사료가 없더라도…
일본의 작가 사마료태랑의 단편에 『고향잊을 수 없나이다』라는 게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임진난때 일본에 끌려간 한국의 도공의 11대 후손인 심수관이다. 그는 중학교에 들어갈때까지도 자기가 일본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를 괘씸하다 하여 일본인학생들이 그를 뭇매질하는 장면이 나온다.
심소년이 「한국인이라고」밝히지 않았다 하여 소년들이 분노했다. 정신을 주입시켜 놓겠다고 으르렁대고, 심소년을 옥상에 끌고 올라가서 10명 가량이 몰려들어 두들겼다. 소년은 정신을 잃을 뻔 했으나 그때마다 혼신의 힘으로 울지 않으려 했다. 일본인은 강하다고 한다. 울면 일본인이 못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매맞은 것을 보면 자기 성이나 가계가 그렇듯이 일본인이 이닌가 보다고 여기기 시작했을 때 쓰러지면서 뒷머리를 다쳐 정신을 잃었다. 오늘 새로 입은 제복이 코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윽고 소년은 제정신을 차렸다….
왜 이런 주제를 일본인이 쓰도록 우리는 내버려두었을까?
얼마 전에 우연히 본 일본의 TV드라머는 또 한국에서 만주로 여자정신대원으로 끌려간 한국여성의 비극을 다루고 있었다. 없어도 그만인 그 많은 드라머에 그 많은 돈을 뿌려가면서 왜 우리네 TV방송국등은 마땅히 우리가 다뤘어야할 주제를 지금까지 드라머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43년 가을 일본군의 비행기가 중국북부의 상공에서 추락하여 여기 탔던 참모본부의 한 고급장교가 잡혔다.
비극 묻어버릴건가
연합군측은 그로부터 일본의 군부내에서도 패전무드가 짙다는 정보를 얻어내어 이 사실을 즉각 미국측에 알렸다. 그러나 미군정보부의 판단으론 일본군의 결전태세가 만만찮다는 것이었다. 이래서 미국측이 소련의 전쟁개입을 불러들이게 됐다는 종전비화가 있다.
만약 미국측의 이와 같은 오판만 없었더라도 한국은 양단되는 비극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난 오만이었든 아니었든간에 해방이 정말로 우리의 힘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바꿔지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아직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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