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차두리 “난 행복한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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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이 끝난 뒤 차범근 전 감독(오른쪽)이 아들 차두리를 격려하고 있다. [시드니=윤태석 기자]

2012년 11월 독일 분데스리가 프랑크푸르트 축구박물관을 갔다. 1980년 프랑크푸르트의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을 이끈 ‘차붐(Cha Boom)’ 차범근(62)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구단 직원은 “차붐은 레전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차두리도 2003년부터 세 시즌을 뛰었다”고 말했다.

 당시 분데스리가 뒤셀도르프에서 뛰던 차두리를 만나고 싶어 고속열차를 탔다. 뒤셀도르프 훈련장에서 ‘잠깐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문자를 보냈지만 ‘부상 때문에 훈련에 불참합니다’라는 답장이 왔다.

 인터뷰를 포기하려 했을 때 차두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멀리서 오셨는데 밥이라도 사겠다”고 했다. 정식 인터뷰는 딱 10분만 했다. 이후 고기를 굽고, 커피도 마시며 두 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다. 참 유쾌한 사람이었다.

 축구 이야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표정이 싹 바뀌었다. “축구인생을 경기에 비유해 달라”는 질문에 차두리는 “후반 40분, 3-5로 지고 있다. 내 축구인생의 승리는 아버지를 이기는 거다”며 “월드컵 4강(2002년)과 원정 16강(2010년)에 힘을 보탰으니 그래도 세 골은 넣은 것 같다. 3-5로 지다가 혼신을 다해 4-5를 만들면 져도 팬들은 박수를 쳐 준다. 2014 브라질 월드컵 16강행에 도움이 된다면 4-5가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차두리는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조별예선 알제리전에서 2-4로 참패하자 TV 해설을 하던 차두리는 “선배들이 실력이 안 됐다.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에게 아시안컵은 마지막 기회였다. 차두리는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서 70m 폭풍질주로 손흥민의 골을 만들어줬다. 차두리는 지난달 31일 호주와의 결승에서 연장까지 12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그리고 2001년 11월 세네갈과의 평가전부터 시작된 13년3개월2일간의 대표 생활도 끝났다.

 연장전에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김진수(23·호펜하임)는 “나 때문에 두리 형에게 우승컵을 바치지 못했다”며 펑펑 울었다. 그러나 차두리는 울지 않았다. 2012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와 2013 FA컵에서 준우승을 한 그는 “부모님이 이름을 잘못 지은 것 같다. 두리(둘째)라는 이름 때문인지 준우승만 세 번째”라며 농담을 했다.

  아시아축구연맹은 SNS에 “포스테코글루 호주 감독이 ‘로봇 차두리’에게 위로를 건넸다”며 호주 감독과 차두리가 포옹하는 사진을 실었다. 결승전 이후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는 ‘차두리 고마워’였다. ‘피겨여왕’ 김연아(25)가 지난해 2월 소치올림픽에서 판정논란 끝에 은메달을 땄을 때 ‘연아야 고마워’라는 검색어가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김연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팬들은 차두리를 향한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차두리는 1일 SNS에 ‘나의 마지막 축구여행은 끝이 났다. 나는 정말 행복한 축구선수’라고 썼다.

 차두리는 차붐이라는 거대한 상대와 싸워 4-5까지 쫓아갔다. 끝내 이기지 못했지만 후회 없는 한판이었다. 그는 소속팀 FC 서울에서 1년만 더 뛰고 독일에서 지도자 자격증을 딸 계획이다. 유럽의 명문 팀을 이끄는 감독이 되는 게 그의 목표다. 차미네이터(차두리+터미네이터)의 질주는 끝나지 않았다.

글=박린 기자
사진=윤태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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