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계의 새바람| 야사의 존재가치 새롭게 인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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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금은 우스운 얘기지만 역사의 편찬을 관에서 독점하던 시대가 있었다. 조선조까지도 역사편찬은 관의 전유물이였으며 이러한 관의역사를 이른바 「정사」라 불렀다.
이에 대해 민간인이 남긴 역사기록인 야사는 민간이 사사로이 썼다하여 외사·패사 또는 야승·야록이라고도 불렀다.
그간 정사를 숭배하는 전통적인 편견속에서 버림받던 야사의 존재가치가 새롭게 인식돼, 이제 우리 역사를 살찌게 하는 소중한 자료로서 그 위치를 굳히고 있다.
현재 전해 내려오는 야사는 5백여종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그 가운데는 이름만 남아있는 것도 많아 실제로는 그리 풍족한 평이 못된다.
강만길교수(전 고려대)는 방대한 관의 기록에 비해 개인기록이 상대적으로 너무 빈약한 이유로, 우선 개인이 객관적 기록을 남길 만한 형편이 못됐던 점을 들었다.
몇 줄의 사사로운 기록이 자칫 무서운 정치적 보복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또 설사 기록을 했다 하더라도 많은 전란통에 온전한 보존이 힘들었으며, 보존이 잘 됐다 해도 대다수가 시문집이었다고 그는 지적했다.
한편 옛날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통해 역사 현실읕 이해했을까. 이를테면 조선조 많은 사람들은 이태조의 등극 등 「개국」에 얽힌 자초지종을 알고 싶었을텐데 이러한 호기심을 무엇으로 충족시켰을까.
당시 「조선왕조실록」같은 이른바 정사가 있었지만 왕도 함부로 볼 수 없었다는 이 정사가 백성의 호기심을 풀어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박성수씨 (국사편찬위원희 편사실장) 는 정사 외에 야사가 나온 것은 대다수 민중에게 역사의 문호가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당연한 부산물이였다고 지적했다 ( 「광장」 7월호)
그러나 민중이 손쉽게 읽을수 있는 야사마저도 자유롭게 개방돼 있었던 것은 아니며 야사로 인해 처형까지 당하는 일도 생겨, 역사적 사실에 대한민중의 호기심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았다.
감추면 감출수록 알고자 하는 욕구는 많아져, 읽을 수 없으면 구전되는 풍문에 귀를 기울이면서 야사는 무궁무진한 민중의 얘기거리로 흘러 내려오기도했다.
박실장은 야사가 읽는 이의 흥미를 끌기 위해 사실의 객관성을 손상시키기도 하나 그런면만을 침소봉대시켜 한갗 얘기거리로만 인식한다면 정작 야사만이 갖는 역사의 진실을 간파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야사를 모조리 믿어선 안되겠지만 정사가 갖지 못하는 야사의 가치를 캐내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학자들은 주장했다.
조동걸교수(국민대)는 특히조선후기「왕조실록」은 당쟁때문에 한편의 사료만이 편파적으로 실려 왜곡된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영조 당시 사도세자 사건은 야사를 통하지 않고는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라는 것.
조교수는 비록 사실이 다르더라도 야사가 갖고 있는 평가의 시각이나 이면의 정신은 정사에서 구할 수 없는 소중한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간결한 서술의 정사로선 파악하기 힘든 인간사회의 다양성을 야사만이 풍부하게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초의 야사인「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 고대사회를 파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많은 학자들의 견해다.
강교수는 정사가 체제옹호적인 기록인 점에서 체제외적 기록은 야사에서 밖에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하고, 그런만큼 「비판성」「객관성」「지방성」은 야사가 지니는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목숨을 걸고 야사를 써댔던 일화들이 전하고 있다.
그는 지배층의 기록에서 피지배층의 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그들을 지배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할 때나 그들이 저항했을 때 벌을 주기 위한 경우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다면서, 야사 또한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민중사 연구에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자들은 특히 조선후기 체제외적 지식층의 활약으로 다량의 야사가 나온 점을 주목하고, 야사가 항상 정사와의 관계 위에서 그 가치가 인식될 때 역사의 이면이 영원히 묻히는 빈약한 민족사를 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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