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이승만대통령(4)|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처음 공개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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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7월16일 아침 국방장관은 동해안에 적군 3천명이 상륙했다고 보고했다. 연합군해군은 해안선을 철통같이 지키고있다고 했었는데 이 또한 허풍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해안을 지키고있는 우리해군은 소형보트로 상륙하는 적군을 격퇴시켰다.
포항비행장은 미군들이 사용하기 위해 수리중이다. 국방장관은 미군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격전중이나 자꾸 후퇴할 기미이고 한국군사령부는 현 전선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 말고 싸우겠다고 맞서고있다고 말했다.

<서울은 빨갱이세상>
「딘」소장은 『대전을 방어하라』는「맥아더」장군의 명령을 받고 휘하 장병들에게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도 동이 트자 금강전선의 미군병은 3백명 만이 남고 모조리 뺑소니들을 쳤다. 열흘동안에 전황을 바꾸어 놓겠다고 큰소리치던「워커」장군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무대를 지키다 7월3일 간신히 서울을 탈출한 경찰관이 서울의 비참한 소식을 알려왔다.
쌀값은 10배로 폭등했고 그나마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화교들은 장개석 총통의 사진을 떼어버리고 공산군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공산군들은 온갖 약탈을 자행, 쌀이며 손목시계·만년필 등 닥치는 대로 빼앗아 북쪽으로 보내고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혔던 빨갱이들이 서울시의 책임자가 되고 거리의 공산군은 10대가 대부분이며 13살짜리도 끼어있다는, 모두가 처절하고 끔찍한 소식뿐이었다.
7월17일, 장마철인데도 날씨는 계속 쾌청하다. 하느님이 우리를 돕고 계시다. 탱크를 막아낼 무기가 없는 우리국군을 불쌍히 여겨 미군기들이 출격, 탱크를 부술 맑은 날씨를 주시는 것이다.
대통령은 지사실에서 제헌절기념행사를 가졌다. 하오2시에는 각도지사와 경찰간부회의가 대통령주재로 열렸으나 서울에서 피납된 구자옥지사 자리만이 비어 눈길을 끌었다. 이 자리에서는 입국허가를 신청한 일본의 요미우리, 산께이, 마이니찌 등 3대신문의 특파원 문제가 논의됐다.
국방장관은「딘」장군의 사단병력5천명 중 절반이상이 희생됐고 미군은 금강에서 6마일을 후퇴했다고 보고했다. 미군은 군산에서 적과 대치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았다.

<3일간 혼수상태>
김석관 교통부장관은 밤낮없이 포화속을 뚫고 병력과 군수품을 실어 날랐지만 아직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윤치영씨를 주불대사로 임명했고 윤 대사는 일본에 건너가 교포의용군을 조직하고 싶어했다. 이일은 문교부장관을 지냈던 안호상씨가 이미 착수하고있었다.
나의 일기는 7월20일로 3일간을 뛰어 넘는다.
이 3일 동안 나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설사가 너무 심해 손끝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4O도에 가까운 고열에 헛소리를 낼 정도였다.
더위를 먹은 데다 물갈이가 설사의 원인이었다. 물은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전에 대통령을 따라 지방에 시찰을 갈 때도 물이 맞지 않아 배탈이 나곤 했다.
대구의 더위는 지독했다. 대통령은 지사관저 뒷마당의 펌프를 틀어 몇 바가지 쏟아버리고는 새물을 받아 시원스레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지하수는 이가 시리도록 찼지만 나는 배탈걱정에 항상 끓인 뒤 식혀 마셨다. 그런데도 탈이 난 것이다. 신경성위염까지 도졌다.
솔직이 말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어려운 때라해도 나는 옆에서 신경을 써주는 사람도 있고 세끼 밥은 거르지 않는다.
집과 가족을 잃고 먹을 것 없이 길거리에 나앉은 우리국민들은 얼마나 고생을 할까 생각하면 나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전투는 계속되어도 어두운 소식뿐인 것 같다. 고열에 들떠 멍멍한 속에서도 대통령의 기도는 매일 밤 나의 귓전에 울렸다.

<미군, 거의가 풋나기>
『오 하느님, 우리 아이들을 적의 무자비한 포탄 속에서 보호해 주시고 죽음의 고통을 덜어 주시옵소서. 총이 없는 아이들은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만으로 싸우고 있나이다. 당신의 아들들은 장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옵니다.
하느님, 나는 지금 당신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대통령의 기도는 절규였다.
조재천 지사부인이 콩나물에다 파를 넣고 끓여 소금으로 간을 맞춘 맑은 국물을 가져왔다. 몇 모금 마시니 속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국물을 아꼈다가 대통령에게 권했다.
대통령은 『마미, 당신이나 두고 마실 일이지…』하시더니 단숨에 한 대접을 몽땅 비우는것이었다.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꾹 참았다.
7월21일, 이날처럼 불행이 겹친날은 없다. 하오4시, 미군이 대전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지휘관 「딘」소장의 실종이란 충격적인 보고가 잇달았다.
대전을 유린한 적군은 물밀듯 남하하는 피난민 대열 속에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섞여 민심을 교란하고 밤이면 게릴라로 돌변, 곳곳에서 미군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한국전에 처음 투입된 미군 병들은 풋나기 초년병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에게 빨갱이와 이남 사람들 구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적인지 모르고 덤벙덤벙 총질만 하고있는 꼴이었다.

<무기 넘겨줬으면…>
차라리 우리에게 무기를 넘겨달라고 애원하고싶은 심정이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밝히고 넘어갈 것은 당시 일본 매스컴의 한국전에 관한 보도 태도다.
공산군에 대전을 빼앗긴 것은 나의 기록으로는 7월20일이다. 그런데 일본의 방송은 그 1주일전에『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했다』고 보도했다.
우리 때문에 전쟁장사로 돈을 벌고 그 지리적 잇점으로 겨우 대접을 받게된 일본이 어째서 이북의 일방적 전승(전승)선전을 고스란히 받아 거짓보도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언젠가 대통령이『일본자위대가 재무장을 하고 우리를 도우러 현해탄을 건넌다면 총부리를 그쪽으로 먼저 돌리겠다』던 말씀이 백 번 옳다는 생각이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었다.

<정리=고정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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