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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서서 관람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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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는 올 가을부터 5유로(약 6300원)짜리 입석 62장을 발매하기로 했다. 공연 개막 45분 전부터 로비의 자동판매기에서 1인당 2장씩 살 수 있다. 지난해 재개관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은 개.보수 공사를 하면서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입석을 없애려 했다. 이에 오페라팬들이 극장 앞에서 촛불 시위를 하고 반대 서명운동을 벌였다. 극장 측은 좌석을 뜯어내고 140명을 수용하는 10유로(약 1만3000원)짜리 입석을 다시 만들었다.

빈 슈타츠 오퍼의 입석은 이보다 훨씬 싸다. 발코니석은 2유로(약 2500원), 무대가 가장 잘 보인다는 1층 뒤쪽은 3.5유로(약 4000원)다. 매일 저녁 567명이 카푸치노 한 잔 값으로 오페라를 즐긴다. 시즌 내내 언제라도 관람할 수 있는 입석 시즌 패스(60유로), 50장짜리 발코니 입석 쿠폰(75유로)도 불티나게 팔린다.

어디 그뿐인가.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 헝가리 국립 오페라, 뮌헨 바이에른 슈타츠 오퍼,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도 입석이 마련돼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 오페라 극장에서는 무려 1000명이 서서 오페라를 관람한다. 심지어 콘서트홀에도 입석이 있다. 빈 무지크 페어라인, 부다페스트 국립 콘서트홀, 프라하 오베치니둠 등 모두가 내로라하는 음악당들이다. 매년 여름 프롬스 축제가 열리는 런던 로열 앨버트 홀은 입석이 1400석이나 된다.

입석 구매자들은 정말이지 오페라가 좋아서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다. 매일 저녁 관람하고 싶지만 좌석표를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음악팬들이다. 몇 주 전부터 함께 모여 대본과 악보를 보면서 철저히 예습하고 오는 매니어들도 있다. 세 시간 가까이 서서 음악을 들으면 다리는 아파도 졸음은 오지 않는다. 음표 하나도 도망가지 않고 귀에 쏙쏙 들어온다. 가수나 지휘자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가차없이 야유를 퍼붓고, 제대로 연주하면 뜨거운 기립 박수를 보내는 것도 이들이다. 공연의 성패는 입석의 분위기에 따라 갈린다.

지난 주말 막을 내린 '니벨룽의 반지'공연을 보면서 문득 입석 생각이 떠올랐다. 4부작을 모두 보려면 가장 싼 자리도 30만원이 넘는다. 결코 적지 않은 액수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입석이 있었다면 단돈 4만원이면 나흘간 16시간짜리 오페라 전편을 관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200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반지'4부작 전곡을 상연했을 때 입석을 25~35달러(약 2만6000~3만6000원)에 팔았다. 표를 사기 위해 줄 서 기다리느라, 서서 듣느라 두 발이 퉁퉁 붓게 마련이다. 하지만 오페라 선율에 심취하다 보면 이도 저도 잊어 버린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3~4층 양쪽 구석에 무대가 20% 이상 보이지 않는 시야 불량석이 172석이나 된다. 객석 의자를 걷어내고 여기에 입석을 만들면 어떨까. 처음부터 표를 팔지 않는 사석(死席) 공간도 활용하고 고정팬도 확보할 수 있다. 오페라가 부유층이나 엘리트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도 털어낼 수 있다. 서서 관람하면 무대도 훨씬 잘 보이고 소리도 더 잘 들린다. 입석은 미래의 오페라 관객을 키워내는 요람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