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신의를 지키며…」-이란사태 팔레비의 시련(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반대세력과 국민의 압력이 점점 거세 지자「샤」는 이란정부구조를 조기대폭 개편하고 왕으로서 자신의 역할도 크게 바꾸는 등의 조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레비」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인지, 군사정부를 세울 것인지, 아니면 퇴위까지도 해야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고심했다.
우리는 동요하지 말고 미국의 지원을 믿으라고 그를 격려했다.

<일기 1978년 11월2일>「샤」가 이미 강력한 지도자 구실을 못하며 낙담하고 자신을 상실해가고 있음이 점차 명백해졌다.
나는「샤」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가 군사정부의 수립을 포함해서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나는 그를 지지하겠노라고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그의 퇴위를 바라지 않았다.「샤」는 자신의 왕위에 대한 도전을 염려하여 주위에 강력한 정치조직을 만들지 않았었다. 그는 군부의 각 군사령관마저도 서로 분리시켜 국왕에게 직접, 그리고 개별적으로 보고하도록 했다.

<미 지원 믿으라 격려>
미국은 이란 정부를 개혁하기 위한「샤」 의 여러 제안에 대해 계속 지지를 보냈다.
그 무렵「샤」는 반체제단체의 일부대표를 포함시키는 연립정부의 수립을 서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지시에 따라 입안된 이란 헌법절차에 맞춰 자기 손으로 뽑은 후계자들에게 권력을 내놓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물론「샤」에 대한 나의 지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샤」의 반대세력들에 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미구호와 성명 때문에「샤」에 대한 우리의 지지결의는 더욱 굳어졌다.
78년 11월 초순께「설리번」대사는「샤」의 반대세력지도자들에게「샤」가 고려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발언권을 주어야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위기에 처한「샤」에게 전적인 지원을 보내든지, 아니면 지원은 하되 미국대사관의 제의를「샤」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든지 양자 택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란의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전국규모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수십만 명의 시위자들이 시가지로 나와「샤」 의 축출을 요구했다.
우리는「샤」에게 몇 가지 질문(주-그의 상황판단과 의도에 관한)을 적은 서한을 보냈으며 그는 즉각 회신을 보내왔다. 그는 군통수권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반대세력 지도자의 한사람에게 연립정부구성을 맡기고 자신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파업 중이던 유전지대의 근로자들 중 일부는 파면과 급료지급중단의 위업 때문에 작업장으로 복귀했으며 최근며칠사이 산유량이 배가되었다. 그러나 이란의 장래는 아직도 불투명하다.<일기 1978년12윌18일>

<박티아르 수상임명>
파업으로 이란경제는 파괴되어 가고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또 국무성을 통해「샤」에 대한 나의 지지를 계속 표명했다. 동시에 우리는「샤」가 그의 반대세력들과 더불어 가능한 한 많은 쟁점들을 해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반대인사 한사람에게 연립정부구성을 맡기겠다는 그의 기본계획은 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연립정부의 수반을 말아줄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반정부세력이 날로 강해지면서 혼란이 계속되는 데다「샤」가 누구에게도 진정 권력을 위임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 사람이 지명을 받고도 거부했다.「샤」는 또 양보조처를 취할 때마다 꼭 며칠씩 끄는 바람에 반대세력은 물론 그의 측근보좌관이나 지지자들까지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1978년 말「팔레비」는 수상으로 서구교육을 받은 온건파 반정부인사인「샤푸르·박티아르」를 임명했고 그는 그 자리를 수락했다.「박티아르」는 놀랄만한 능력과 독립성을 과시했다. 그는 즉각「샤」의 출국을 요구했고 비밀경찰조직의 해체와 시위군중에 대한 발포책임자의 재판회부, 그리고 민간인들에게 외교책임을 말길 것 등을 요구했다.
「샤」는 앞서의 말을 뒤엎고 이란을 떠날 의사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보좌관들에게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이란을 떠날 각오가 서있긴 하지만 새 지도체제가 확립되고 의회가 자신의 초처를 승인한 후 이란의 헌법절차에 따라 명예롭게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란의 질서가 회복되려면 먼저「샤」가 출국해야 하리라는 것은 국왕의 지지자들에게까지도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다. 내가 CIA·국무성, 그리고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로부터 받은 보고들도 우선「샤」가 떠나야 한다는 점을 나에게 강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엄을 지키면서, 그리고 안정된 후계정부가 들어선 뒤에 이란을 떠나야 한다는 「샤」의 주장에 동의했다.
마질리스(이란의회)는「박티아르」의 수상취임을 승인했다. 그러나「호메이니」는「샤」 에 충성한 인사라면 그 어느 누구도 이란의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망명지 파리에서 선언했다.
1979년1월초「박티아르」는 당시 이란헌법에 따라 내각구성에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호메이니」는 아직「박티아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낙관했다. 어느 정도의 독립성과 과단성을 보여준「박티아르」는 일부 반대세력의 지지도 받고있었다.
그러나「설리번」대사는 미국이「샤」의 계획을 반대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샤」가 즉각 출국을 해야하며 우리는「호메이니」와 어느정도친선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샤」와「박티아르」,그리고 이란의 군부지도자들에게 미국의 계속적인 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런 건의를 일축했다. 이 무렵 국무성일각에서 나의「샤」 지원정책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보도가 워싱턴에 나돌았다.

<군 정보 제대로 못 빼>
한편 테헤란의「설리번」대사는 정보와 판단의 주요 소스인 이란군부에 관한 정확한 보고를 우리들에게 제공하지 못하고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해럴드·브라운」국방장관과 나는 이란군부의 의사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테헤란에 능력 있는 지도급인사를 한사람 파견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란에 파견될 사람은 또 이란군부지도자의 결의를 굳건하게 하고「샤」가 출국하더라도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이란에 잔류하도록 그들을 격려해야했다. 나는 이런 임무를 수행하도록 유럽주둔 미군부사령관「로버트·호이저」장군을 이란으로 파견했다.
우리는 이와 동시에 워싱턴 주재이란대사「아르데시르·자헤디」의 요청에 따라「샤」가 외국에서「휴가」를 보내기로 결심할 경우 국왕일가가 거처할 곳으로 캘리포니아의 한 별장용 마련해 놓았다.<무단전재·출판금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