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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로비 의혹' 데자뷰 정윤회 문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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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김대중 대통령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1999년 6월.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였다. “김태정 법무부 장관을 경질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안색이 변했다. 해외 순방 도중 김태정 법무부 장관의 부인이 재벌기업 회장 부인에게 옷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으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였다. 질문에 대한 김 대통령의 첫 반응은 퉁명스러웠다.

“뭐라고요.” 그것이 ‘짜증’이자 ‘면박’이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질문을 한 기자가 나였으니.

 회견장에서 대통령한테 질문했다가 면박을 당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당혹스러웠지만 다시 한 번 “법적 책임이 없어도 도덕적 책임을 물어 경질할 용의는 없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나온 단어가 ‘마녀사냥’이었다.

 “언론이 마녀사냥을 한다고 어떻게 장관을 경질합니까. 일국의 장관 인사는 그렇게 돼선 안 됩니다.”

 김 대통령은 계속 서운한 마음을 격하게 털어놓았다.

 “나이 먹은 대통령이 몽골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신문은 기껏 1단밖에 안 쓰고, 실체 없는 옷로비 사건은 대서특필하고.”

 기자회견장이 썰렁해진 상태에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한 기자가 “이번 순방의 외교적 성과를 설명해 달라”고 하자 김 대통령은 이번엔 “좋은 질문입니다”고 했다. 졸지에 나는 ‘나쁜 질문’을 한 기자가 됐다. 어쨌거나 바로 다음날자 모든 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언론이 마녀사냥 한다”는 김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후폭풍이 일어났다. 여론이 악화됐고, 김 대통령은 얼마 후 ‘마녀사냥’이란 발언을 거둬들이고 공식사과를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대통령을 폄훼하려 박물관에 보내야 할 기억을 꺼내 온 건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정윤회 문건 파동이 점점 옷로비 의혹사건과 닮아가고 있어서다.

 이번 정윤회 문건 파문의 자극성은 그때와 비슷하다. 아니, 정윤회와 십상시 혹은 문고리 권력이란 말의 침투력은 어찌 보면 당시보다 훨씬 강하다. 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접근방식도 닮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문건에 나온 내용들뿐 아니라 측근들의 암투설까지 송두리째 ‘찌라시’에 나올 얘기로 규정했다. 소위 ‘십상시’라는 사람들이 중국집에 모여 짜장면을 먹었는지 밥을 먹었는지 지금 검찰 수사가 벌어지는 와중에서다. 김 대통령이 ‘마녀사냥’으로 규정한 시점도 검찰 수사가 벌어지는 도중이었다. 김 대통령의 ‘마녀사냥’ 발언 다음날 검찰은 관련자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가 대한민국에 최초의 특검 수사를 불러 왔다. 물론 옷로비 특검은 “드러난 건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란 것일 뿐”이란 말만 남긴 채 종결됐지만 일련의 사태로 정권이 받은 신뢰의 타격은 컸다.

 박 대통령은 "정윤회씨는 오래전 내 옆을 떠난 사람, 청와대 비서관 3명은 우직한 일꾼일 뿐인데 무슨 권력다툼의 주체였겠느냐”는 인식을 보였다. 박 대통령의 ‘찌라시’ 발언은 분명 그런 믿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믿음’은 ‘기만’에 속기 위해 존재하는 말일 수도 있다.

 정씨만해도 청와대 비서관들과 전화 한 통 한 적이 없다고 하더니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의 폭로가 나오니 “한 번 통화했다”고 말을 바꿨다. 또한 심부름꾼이 강한 권력이 될 수 있음을 박 대통령은 간과했다.

 물론 문건에 나온 대로 그들이 김기춘 비서실장을 몰아내려고 모의를 했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모든 게 ‘찌라시’ 속의 일이라는 박 대통령의 예단은 또 하나의 특검을 부르는 발언일 뿐이다. 의혹이 정말 루머였다해도 그만 진실에 ‘가이드라인’이란 갑옷을 입히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오히려 거꾸로 말했어야 했다.

 “검찰은 내 주변부터 더욱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