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이라크 주둔군 감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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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존 리드 영국 국방장관이 17일 CNN 방송과의 회견에서 "향후 12개월에 걸쳐 이라크 주둔 영국군 규모를 감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발언은 최근 영국 일간지 더 메일 온 선데이가 보도한 '이라크 주둔군 철군에 관한 비밀계획'을 시인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리드 장관은 비밀계획에 대해 "영국과 미국 모두 이라크에서 제국주의적 야망을 갖고 있지 않다"며 "치안 책임을 이른 시일 안에 이라크 자체 병력에 넘기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라크에는 이미 17만 명의 자체 병력이 양성돼 있다"고 지적하고, "이라크에 주둔 중인 약 8500명의 영국군도 필요한 기간만 더 주둔하고 철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주 더 메일은 리드 장관 명의로 된 철군 계획에 관한 보고서를 입수해 단독 보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은 내년 중반까지 이라크 주둔군을 절반 이하로 대폭 감축할 계획이다. 보고서는 현재 총 17만6000명인 미국 주도 연합군 규모를 6만6000명선까지 감축한다는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고 있다. 영국군의 경우 3000명으로 규모가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리드 장관은 "미국이나 영국 모두 이라크 군대와 경찰이 치안 유지 능력을 갖출 때까지는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이라크의 치안 상황이 계속 악화하고 있다"며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이라크 정부에 대한 극단주의자들의 방해 공작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영국은 이라크 종전 이후 조금씩 병력을 감축해 8500명 규모로 유지해 왔으며, 지금까지 모두 92명의 영국군이 이라크에서 목숨을 잃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뉴스 분석] 미국 주도 참전동맹 흔들
한국군에도 영향 불가피

이라크 주둔군 감축에 관한 비밀계획의 존재를 시인한 영국 국방장관의 발언은 이라크 참전 동맹국들의 이라크 철군이 가시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이라크 참전 동맹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과 함께 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영국이 철군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점령 정책의 실패다. 지난 2년 동안의 치안 회복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내 폭력 사태는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15, 16일 이틀간 10여 건의 연쇄 자살폭탄 테러가 터져 16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합군 및 민간인 희생자가 늘면서 여론의 철수 압력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게다가 병력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다.

결국 최선의 방안은 치안 유지를 이라크 자체 병력에 맡기고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이다. 이라크는 17만 명의 치안군과 경찰력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훈련받은 병력은 전체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철군 움직임이 가시화하면서 다른 동맹국들도 흔들리고 있다. 이미 다국적군을 구성하는 36개국 가운데 10개국이 철수했다. 불가리아.폴란드.우크라이나.호주는 올해 말 또는 1년 내 철군한다고 발표했다.

3000여 명을 파병한 이탈리아도 9월부터 철수할 계획이었으나 미국의 설득으로 일단 유보했다.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북부 아르빌에 파병한 한국도 이 같은 철군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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