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팬들 압박에 … 롯데 자이언츠 경영진 손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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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구단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며 부산 사직구장 앞에서 삭발 시위를 하고 있는 롯데 자이언츠 팬. [뉴스1]

선수단 사찰 문제로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가 분란에 휩싸이자 롯데 팬들이 전국 각지에서 구단 고위층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롯데의 홈인 부산 사직구장 앞에서, 한국시리즈 2차전이 열려 취재진이 몰린 대구구장 앞에서, 그리고 서울 제2롯데월드 앞에서 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팬들의 압박에 롯데 구단도 두 손을 들었다. 롯데 팬들이 퇴진을 요구한 최하진(54) 롯데 자이언츠 대표이사와 배재후(54) 단장이 6일 사의를 표했다. 일주일 전 사의를 전한 이문한(53) 운영부장까지 포함하면 야구단 최고위인사 3명이 동시에 물러났다. 이들을 물러나게 한 건 모그룹의 인사조치가 아니라 팬들의 압박이었다.

 지난 5일 밤 사직구장 앞에 100명의 팬들이 집결했다. 마스크를 쓴 이들은 “선수들을 사찰한 최 대표는 책임지고 물러나라. 구단 내 파벌을 만든 직원들도 팬들에게 사과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의 시위는 1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지난 2일 ‘롯데자이언츠클럽’ 회원들이 사직구장 앞에서 삭발식을 열었다. 서울에서도 10여명이 ‘자이언츠를 살려달라’(Save the Giants)라는 문구가 적힌 옷을 입고 제2롯데월드에서 릴레이 시위를 했다.

 롯데 팬들의 민심이 폭발한 건 선수단 사찰의 배후에 최 대표가 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롯데 선수들은 최 대표와의 면담에서 “원정경기 호텔의 CCTV를 통해 선수들을 감시하는 게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최 대표는 답변을 피했고, 권두조 전 수석코치와 이 운영부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롯데 선수들이 지난달 28일 “이 부장이 오면서 편이 갈리기 시작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 부장은 선수들에게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맞섰고, 선수단-구단이 싸우는 과정에서 선수단 사찰을 지시한 게 최 대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분노한 팬들은 거리로 뛰어나왔다.

 지난달 말 한화 팬들이 김성근(72) 감독 영입을 촉구하는 시위와 캠페인을 벌였다. 구단(혹은 그룹)의 권한인 인사문제에 팬들이 목소리를 냈고, 그게 진짜로 이뤄졌다. 한화 팬들처럼 롯데 팬들도 롯데그룹과 여론을 겨냥해 적극적인 ‘소비자 운동’을 벌인 것이다.

 부산 시민들은 한국에서 가장 열성적인 야구 팬들이다. 그러나 최근 2년간 야구 열기가 싸늘하게 식고 있다. 2008년 137만 명을 시작으로 5년 연속 100만 명을 돌파했던 홈 관중은 지난해 77만 명, 올해 83만 명에 그쳤다. 올 시즌 성적(7위)도 형편 없는데, 구단과 선수단은 낯부끄러운 내분까지 세상에 드러내놓고 싸우고 있다. 팬들의 실망감은 더 커졌다.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팬이 구단 운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롯데 사태는 분명 구단에 책임이 있다. 팬들이 야구단에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냈지만 구단이 선수단을 무시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롯데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효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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