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홍수 시대 내게 필요한 리스트 또 만들어야 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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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호 34면

어릴 때 나는 리스트를 사랑하는 소녀였다. 팝송과 스포츠에 빠져있던 사춘기 시절 빌보드 핫 100 차트와 세계 권투 협회가 매달 발표하는 체급별 세계 랭킹 리스트를 끼고 살았고 일기장엔 나만의 고교 야구 포지션별 대표선수 명단을 매일 바꿔 적었다. 교수의 장황한 강의를 번호 매겨 리스트화한 내 노트는 시험 때 친구들의 인기품목이었고 족집게 예상문제 답안 리스트의 앞글자만 외우는 식으로 객관식 시대에 우수한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효과적인 기억에 도움을 주는 리스트의 힘은 막강해서, 나는 아직도 중학교 가정시간에 외운 ‘돌려짓기 농사 식물은 가지, 오이, 고추’를 기억한다(도대체 이런 걸 왜 배웠는지는 모르겠다).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호모 리스트쿠스

하지만 어느 때부터 리스트는 애증의 대상이 됐다. 특히 나이 들면서 ‘20대에, 혹은 3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10가지’‘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특징’ 같은 걸 볼 때 그렇다. 아, 내 인생이 오늘날 이 꼴이 된 건 그때 그런 걸 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싶은 후회와 자책을 불러일으킨다.

그뿐인가? ‘암을 예방하기 위해 먹어야 할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입맛을 떨어뜨리고 ‘커피가 몸에 좋은 이유’ 리스트는 자고 나면 ‘커피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로 순식간에 바뀌어 사람을 헛갈리게 한다. 카톡으로는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라’로 시작하는 40대의 행동지침을 날마다 보내는 친구들이 있다. 죽기 전에 가야할 도시들은 왜 그렇게 많으며 죽기 전에 해야할 일들은 또 왜 그리 많은가. 죽기 전에 멋진 여행을 가고 좋은 일을 하기 전에 내 책상 위에 뒹굴고만 있는 ‘추석명절에 7인의 명사들이 추천한 도서’들, 그보다 오늘의 해야할 일 리스트, 저녁 밥상을 차리기 위해 사야할 장보기 리스트 같은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다간 ‘죽기 전에…’ 리스트를 하나라도 해보기 전에 스트레스로 먼저 죽을 것만 같다.

바야흐로 우리는 리스트의 시대에 살고 있다. 리스트는 지난해부터 미디어 세계에서 가장 ‘돈이 되는’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 허접한 리스트를 나열한 인터넷 미디어 ‘버즈피드’는 뉴욕타임스에 버금가는 회사가치를 인정받았다. 백 년 넘는 세월동안 유려한 기사 문체를 위해 고생했을 정통 신문 기자들은 땅을 치고 통탄할 노릇이지만 어쩌겠는가. 이제는 타임지같은 전통의 매체들 역시 번호 매기기 식 기사를 올린다. 페이스북을 열면 ‘~하는 몇 가지’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진다. 개인의 SNS 글도 인기를 얻으려면 번호 매긴 리스트식으로 쓰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페북 포스팅을 살펴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덧 의미 없는 번호를 문단마다 1. 2. 하는 식으로 매기고 있을 것이다. 뇌과학에서도 혹은 심리학적으로도 리스트는 무한하게 널려있는 정보들을 유한한 것으로 인식하게 해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적은 노력으로 이 정보를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해준단다.

사실 그렇다. 성공하는 7가지 비결만 알면 성공할 것 같고 침대에서 남자를 유혹하는 7가지 비결만 알고 있으면 언젠가는 천하제일의 요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다. 오죽하면 성경에서도 10계명으로 딱딱 정리해서 우리가 살아야 할 도리를 외우기 쉽게 전파했겠는가. 정작 알아듣기 힘든 의사들의 질병 검사 결과나 치료방법, 교수들의 논문 같은 것도 몇 줄 리스트로 정리해서 말해줬으면 싶기도 하다.

그러니 쓰기 쉽고 읽기 쉬운 리스트는 우리를 유혹하고 희망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좋은 글을 쓰는 9가지 비법’을 아무리 외우고 있다 해도 수십 년 걸려 읽고 쓰고 다듬는 노력이 없으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걸. 공부 잘하는 비법, 연애에 성공하는 비법을 수백 가지 외워도 우등생이 되기란, 내 인생의 짝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걸. 결국 리스트는 정보 홍수의 산만한 시대에 사과 대신 후루룩 마시는 사과 주스 같은, 정보의 패스트푸드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우리의 묘비명마저 리스트 식 글이 될 것 같은 이 호모 리스트쿠스 시대에는 애증의 리스트와 잘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나만 해도 그 추세에 따라 ‘내맘대로 리스트’라는 패러디 리스트 글로 원고료를 벌고 있으니.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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