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자! 이제는] 4. 갈 길 먼 은행 친절서비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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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김모(41)씨는 며칠 전 급전이 필요해 은행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 창구에 앉은 김씨 앞에 놓인 것은 여러 장의 대출 서류. 그는 연필로 동그라미 친 서류 곳곳의 서명란에 이름을 죽 써 내려갔다. 은행원은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여기에 서명하면 된다"고 알려 줬다. 그러나 주의사항이나 약관 등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었다. 김씨는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자꾸 주눅이 들고 눈치가 보여 그냥 나왔다"고 말했다.

시중은행과 거래하다 보면 김씨처럼 '동그라미 서명란'을 마주칠 때가 많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서명만 하고 끝내자'는 무언의 강요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객에게 상품 내용과 위험 사항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건 은행 서비스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은행 점포가 한둘이 아니다.

50대 주부 이모씨의 사례를 보자. 혼자 살던 그는 2004년 한 은행에서 정기예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그 뒤 미국의 딸 집에서 6개월을 머물다 우연히 연체했는데, 은행 측은 김씨와 통화가 되지 않자 담보로 잡은 예금에서 돈을 빼 연체금을 갚았다. 이씨의 항의에 은행은 "약관에 대출과 예금을 상계할 수 있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씨는 "약관을 교부받은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예금과 대출이 상쇄돼 별 탈은 없지만 은행들의 서비스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은행들도 친절한 이미지를 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은행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친절 서비스→고객 만족→수익성.경쟁력 향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객의 '금융 수요'를 적극 파악해 새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씨앗이 바로 친절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A은행 이모(38) 과장의 고백.

"지점에서 5년간 대출을 담당했지만 상품 약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어느 날 무심코 약관을 읽으니 이해 안 되는 부분이 80%가량 되더라."

무엇보다 그는 판매 실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서비스 정신이 위축되기 쉽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최근 "관료주의 때문에 고객들에게 불친절하다. 언제부터 '귀족은행'이 됐나"라고 질타했다.

◆ 외국에서는=한 은행 임원은 "독일 은행들은 대출서류를 작성하는 데만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고객을 위해 그만큼 꼼꼼하게 내용을 짚어준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독일상공회의소 관계자는 "계좌 하나 틀 때도 조목조목 알리는 게 습관이 됐다"고 덧붙였다. 금융연구원 김병연 박사는 "미국 은행들도 돈을 빌려줄 때 꼼꼼하게 내용을 짚어준다"며 "제대로 고지하지 않으면 나중에 소송을 당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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