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과 거래하다 보면 김씨처럼 '동그라미 서명란'을 마주칠 때가 많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서명만 하고 끝내자'는 무언의 강요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객에게 상품 내용과 위험 사항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건 은행 서비스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은행 점포가 한둘이 아니다.
50대 주부 이모씨의 사례를 보자. 혼자 살던 그는 2004년 한 은행에서 정기예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그 뒤 미국의 딸 집에서 6개월을 머물다 우연히 연체했는데, 은행 측은 김씨와 통화가 되지 않자 담보로 잡은 예금에서 돈을 빼 연체금을 갚았다. 이씨의 항의에 은행은 "약관에 대출과 예금을 상계할 수 있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씨는 "약관을 교부받은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예금과 대출이 상쇄돼 별 탈은 없지만 은행들의 서비스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은행들도 친절한 이미지를 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은행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친절 서비스→고객 만족→수익성.경쟁력 향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객의 '금융 수요'를 적극 파악해 새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씨앗이 바로 친절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A은행 이모(38) 과장의 고백.
"지점에서 5년간 대출을 담당했지만 상품 약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어느 날 무심코 약관을 읽으니 이해 안 되는 부분이 80%가량 되더라."
무엇보다 그는 판매 실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서비스 정신이 위축되기 쉽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최근 "관료주의 때문에 고객들에게 불친절하다. 언제부터 '귀족은행'이 됐나"라고 질타했다.
◆ 외국에서는=한 은행 임원은 "독일 은행들은 대출서류를 작성하는 데만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고객을 위해 그만큼 꼼꼼하게 내용을 짚어준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독일상공회의소 관계자는 "계좌 하나 틀 때도 조목조목 알리는 게 습관이 됐다"고 덧붙였다. 금융연구원 김병연 박사는 "미국 은행들도 돈을 빌려줄 때 꼼꼼하게 내용을 짚어준다"며 "제대로 고지하지 않으면 나중에 소송을 당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김준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