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책, 「한민합의」위에 세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최근 열린 미하원 아시아-태평양소위부회의 대일공청회에서 「존슨」전주일대사는 일본이 컨센서스(합의)에 의해 정책을 결정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무리한 방위증강, 시장개방요구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지 모른다고 일본을 옹호한 일이 있다.
『미국에서는 위로부터의 지도력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밑으로부터 컨센서스를 모아 상위기관에 전달되는 체제이기 때문에 수상이라도 마음대로 정책을 좌우하지 못한다』 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그의 지적대로 일본정부의 정책결정과정이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것은 사실이다.
다양한 세력집단이 정책결정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으며 특히 재계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흔히 「일본을 움직이는 것은 관료·자민당·재계」라는 말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정책결정의 최종 귀착점은「국민의 의사」이며 언론과 선거를 통해 국민의 뜻이 정책담당자들에게 끊임없이 전달됨으로써 국민적 컨센서스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년간의 연구와 내각의 결의까지 거친 부가가치세제(일본서는 일반소비세라고 부름)가 끝내 실시될 수 없었던 전말을 더듬어보면 일본의 경제정책 결정과정과 각 변수의 역관계가 어떤지를 짐각할 수 있다.
일본에서 부가가치세 도입문제가 공식으로 제기된 것은 74년10월14일 「다나까」(전중각영) 당시 수상이 총리부자문기관인 「세제조사회」(회장 소창무일)에「사회경제의 진전에 즉응하는 세제」의 연구를 요청한데서 비롯됐다.
당시 일본은 제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늘어나는 재정적자에 고심하고 있었다.
수상의 요구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세수증대방안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조세수인은 전전까지만해도 간접세 70%, 직접세 30%의 비율이던 것이 패전후 미군정의 세제개혁이래 절대60%로 그 비율이 역전돼 있었다.
따라서 세수증대를 논하는데는 간접세 증수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고 대장성내에서는 진작부터 부가가치세 문제가 비공식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이런 배경아래 시작된 세제조사회의 세제연구는 처음부터 부가가치세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당연한 결과로 77년77월4일 세제조사회가 제출한 보고서는 일반소비세(부가가치세)의 도입을 권고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대장성 주세국이 직접 제안, 추진할 수도 있는 문제를 세제조사회라는 민간자문기관을 시켜 3년간이나 연구·검토시키고 그 자문기관으로 하여금 새세제의 도입을 권고토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점이 일본식 정책결정방법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제조사회는 3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위원들은 학계·재계·언론계·노동단체·부인단체·중소기업대표·문인·지방자치단체장 등을 거의 모두 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상임제가 아니기 때문에 실무작업은 대장성·주세국이 맡도록 돼 있으며 따라서 엄격히 말한다면 새조세제도에 대한 연구를 대장성·주세국이 각계 이익대표들의 검증을 받아가며 공동으로 추진했다고할 수 있다.
3년간의 연구·검토기간중 주세국직원들은 위원들의 연구에 따라 자료수집정리·보고로 바쁘게움직였다. 부가가치세 도입에 한걸음 빨랐던 한국의 국회속기록을 몽땅 베껴가기도 했다.
연구작업은 세제조사회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수상은 자민당총재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자민당 정무조사회산하 세제조사회도 총리부 세제조사회와 같은 시점에서 별도로 연구작업에 들어갔다. 주세국은 이곳에도 자료제공, 설명을 하러 다녀야 했다.
정부의 주요정책은 집권당인 자민당의 득표와 직결되기 때문에 자민당은 정부의 주요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이 일을 맡는곳이 정무조사회(속친 정조회다).
어쨌든 총리부 세제조사회가 3년간의 검토끝에 부가가치세에 대해 긍정적 결론을 내리고 보고서를 작성, 제출한 것은 77년10월4일이었다.
세제조사회의 보고서가 총리부를 거쳐 대장성에 공식으로 전달됨에 따라 주세국은 이를 근거로 78년1월특별팀(타스크포스)를 만들어 본격적인 세제개혁작업에 착수했으며 세제조사회도 별도로「일반소비세특별부회」를 새로 설치, 세제의 구체적 내용을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후꾸다」내각이 물러나고 「오오히라」(대평정방)내각이 들어선지 20여일만인 53년12월27일, 세제조사회는 매년 정기적으로 제출하는「연도별세정보고서」를 통해 부가가치세를 80년1월부터 실시할 것과 세율을 5%로 할 것을 권고했다.
하루 전날인 12월26일에는 자민당세제조사회도 보고서를 내고 부가가치세를 80회계연도부터 실시할것을 권고했다.
이처럼 정부자문기관과 자민당 정조회로부터 청신호가 떨어지자「오오히라」내각은 다음해인 79년1월19일 각의에서 세제개정요강을 결의, 80년중에 일반소비세를 실시할 것을 정식결정했다.
이에 따라 대장성은 법률안작성을 서두는 한편 업계·근로자단체·각급기관등을 상대로 부가가치세를 이해시키기 위한 설득작업을 펴 나갔다.
79년봄부터 가을까지 주세국이 전국에 걸쳐 실시한 설명회는 2백∼3백회에 달했다고 한 관계자는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를 도입한다는 정부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현실성을 띠자 중소기업·새러리맨등 서민층으로부터 거센 반대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해 10월7일의 총선거를 앞두고 있던 자민당은 처음에는 증세의 불가피성과 일반소비세제 도입의 필요성을 선거운동의 전면에 내세웠으나 여론의 반대가 거세지자 투표일을 불과 10일 앞둔 9월26일 일반소비세실시를 단념한다는 특별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세는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 자민당은 정권을 위엽받지는 않았으나 참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선거의 참패는 자민당내 파벌싸움의 격화와 끌내는「오오히라」수상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새로 구성된 국회는 12월21일 일반소비세법안을 부결하는 것은 물론 한걸음 나아가 앞으로 같은 이름의 법안을 국회에 제출할수도 없다는 특별결의를 채택했다.
부가가치세 도입문제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에서의 주요정책결정은 대체로 이와 비슷한 과점을 밟는다.
현재는 행정개혁이 주요정책과제로 등장, 임시행정조사회가 검토작업을 진행중이다.
작년 3월에 시작된 임시행정조사회의 작업은 83년3월에 최종 보고서를 낼 예정이다.
일본행정부내에는 주요 국단위로 세제조사회 혹은 임시행정조사회와 비슷한 성격의 자문기관이 마련돼 있어 주요정책은 모두 이곳에서 일단심사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설치된 각종 자문기관을 보면 총리부에 5l개, 대장성에 14개, 농림수산성에 13개, 통산성에 20개, 노동성에 13개 등 모두 2백60개에 달한다.
주요정책은 관계성청의 과단위에서 입안, 국단위에서 관계기관의 자문이나 협의를 거쳐 부처안이 마련되며 이것은 다시 자민당정무조사회부회→정무조사회심의회→총무회→국회대책위를 거쳐 국회에서 논의된다.
농민·재계·근로자단체 등 이익집단은 이같은 긴 검토과정에서 언론을 통해 자기주장을 펴거나 지역구의원 혹은 자민당내 파벌을 통해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며 최종적으로는 투표권행사로 자기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동경=신성순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