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사정관 1명, 400명 심사 … 자기소개서 대필 못 걸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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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에선 다들 이렇게 하는데, 왜 나만 문제 삼나요.” 학부모 이모(49)씨가 교사에게 돈을 주고 ‘가짜 스펙’을 만들어 아들 손모(20)씨를 유명 사립대에 입학시켰다가 적발된 뒤 경찰에서 한 말이다. 이씨의 돈을 받은 교사는 다른 학생 작품을 경시대회에 손씨 이름으로 제출해 상을 받도록 하거나 교사추천서에 하지도 않은 봉사활동 경력을 적어냈다. 이런 수법으로 손씨는 2012년 모 대학에 합격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시 2013년 입시에서 다른 대학에 합격했다.

 손씨의 불법 입시를 걸러내지 못한 입시전형이 입학사정관제(현 학생부종합전형)다. 손씨 사건을 계기로 최근 급속도로 확대된 ‘학생부종합전형’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국내 봉사활동과 해외 활동기간이 겹치는 황당한 오류조차 서류·면접에서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김경범 서울대 입학관리본부 교수는 “시험기간에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는 식으로 믿기 어려운 학생부가 종종 제출돼 잘 걸러내기 위해 애를 쓴다”고 말했다. 이런 허점을 노리고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 주는 컨설팅업체 수백 곳이 최근 영업 중이다. 자소서 한 건당 적게는 수십만원, 많게는 수백만원까지 받는다고 한다. 한 입시업체 대표는 “대학·학과·문항별로 맞춤형 서비스를 해 주는데 입학사정관의 눈에 띄는 게 우선이다”며 “검증할 수 없는 수준에서 다양한 얘기를 넣고 다듬어 준다”고 말했다. 학부모 장모(48)씨는 “고등학생이 교내 스펙을 갖고 얼마나 차별화할 수 있겠느냐”며 “결국은 자기소개서 쓰는 노하우 차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수시와 정시로 구분된 2015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수시모집은 전체 모집정원의 65%를 차지한다. 전체 수시모집 정원의 24%를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선발한다. 서울대의 경우 수시모집의 77%를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뽑는다. 건국대·동국대·한국외대 등은 추가 증빙서류를 안 받고, 경희대·성균관대·한양대 일부 전형에선 면접을 안 본다. 정부의 입시서류·면접 간소화 방침에 따라 이런 추세가 강화될수록 학생부 비중이 절대적이다.

 한 서울 소재 사립대 입학처장은 “대학 입장에선 학교 측이 제출한 서류를 믿을 수밖에 없다”며 “교사·학생이 적극적으로 부정에 가담할 경우 가려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입학사정관들이 9월에 원서를 접수해 12월까지 수천 명의 지원자 서류를 검토하는 한계도 있다. 유기홍(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 지난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입학사정관 1인당 400명 이상의 서류를 심사하는 대학이 20%에 이른다.

 이에 대해 김경숙 한국대학입학사정관협의회 회장은 “일부 교사의 부도덕한 행위가 문제이지 전형상의 문제는 아니다”며 “학생·학부모에게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전형별로 평가에 필요한 증빙서류를 충분히 요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희동 진학사 입시전략연구소장은 “미국은 중·고교 시절부터 입학사정관이 꾸준히 학생을 관찰하는데 우리는 입시철에 서류에만 의지하는 한계가 있다”며 “입학사정관이 고교를 방문할 때 입학에 관심을 갖는 학생은 데이터베이스(DB)에 입력해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평가이사는 “학교 게시판에 교내 경시대회 수상자 명단을 일정기간 게시하도록 하는 등 교내 검증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며 “부정입학의 경우 사후에라도 입학을 취소하고 형사처벌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기환 기자

◆학생부종합전형=학교생활기록부·자기소개서·교사추천서·면접 등을 통해 지원자의 학력·소질·인성·잠재력을 종합평가해 선발하는 수시모집 전형. 교내 경시대회 수상 경력, 동아리·봉사활동 등 비(非)교과 활동 내용을 비중 있게 평가한다. 대학별로 요구하는 수능 최저 등급이 없거나 매우 낮다. 학생부 교과 성적 위주로 평가하는 ‘학생부교과전형’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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