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여, 짧지 않게』|필자 박중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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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번 주일부터 박중희씨의 「주구 잡기」를 주 1∼2회 본지에 연재합니다. 박씨는 1968년부터 77년까지 10년간 중앙일보 런던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유럽 전역을 무대로 취재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런던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그걸 「세상에서 제일 오래된 직업」이라고 한거야 그리 신기로울게 없다.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 자연 그런게 필요하게 됐을게고 또 그것은 전문적으로 하는 「일」인 바에야 업이라고 못 부를 것도 아니다. 좀 새롭다면 그런 말이 앞으로 왕 자리에 오를 사람 입에서 나왔다는 거다.
언제 어디서 어떤 표정을 짖고 한 건진 몰라도 왕 노릇 또한 하늘 아래 최고의 직업이라고 했다는 「찰즈」 왕자의 말이 「왕가 어록」이라는 신간책 겉장에 간판처럼 내걸려 있는걸 보면 편집자도 그걸 꽤 신용하게 봤나 보다. 그럴 만도 하긴 하다.
『왕은 통치하지 아니하고 군림한다』쯤으로도 정말 그러셨던가를 해 온 터다. 그런데 그게 이제 『왕 노릇도 업이다』로 됐으면 세상은 아닌게 아니라 약간 바뀌긴 바뀌어 온 셈이다.
워낙 영국 사람들이 그렇고 왕자 또한 좀 익살기가 껴 있는 편이라 업 운운이 입에서 나오는 동안 그의 한쪽 눈이 껌벅였음직은 하긴 하다. 그랬건 말건, 확실한건 그게 거룩하게 군림하고 있어 왔을 군주의 모습과는 꽤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뭐가 달라지고 있다는 거야 별로 이상할 건 없다. 이상한건 달라질 법도 한게 용케도 안 변하고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이 왕국이라는게 그렇다.
딴것 제쳐놓고 그동안 『태양이 지는 일없는 대제국』이 무너졌으면 거기서 이는 먼지 바람만으로도 왕관이 좀은 흔들렸음직은 한 일이다. 딴데선 비교적 대단찮은 일로 대소 왕들이 거의다 왕관을 벗었거나 뺐겼다. 그렇다고 영국 사람들이 누구보다 양순해서도 아니다. 안 믿어도 좋지만 신이 대영 제국 판도 위에서 해가 지지 않게 했던 것은 해가 져 어둬지면 그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돼 그러셨다는게 그들이다. 그러니까, 여기 왕들이 용하긴 용했다.
하도 그게 신통했던지 왕년의 애급왕 「파루크」였던가, 이 지구상에 제일 나중까지 남을 왕을 다섯 정도로 보고 그것을 서양화 무속의 킹 (왕) 4장하고 영국 왕으로 꼽았었다. 셈치곤 아주 어림없진 않았다. 그럼 왜 영국 왕실이라고 해 이렇게 명이기냐?
그걸 간단히 몇마디로 대답하기 보단 아마 정치학 박사 두어개 하는게 쉽고 빠를지 모른다. 그래 「파루크」씨의 말이라는 걸 다시 빌면 그 까닭의 하나는 이런데 있었단다-『왕(영국 왕들)이라고 하지만 왕이 아니거든!』 오랫동안 왕들이 정말 그랬듯이, 또 오랫동안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듯이, 이를테면 사람 목숨 쉽게 칠 수 있는 초인의 힘 정도는 가졌어야 그게 왕이었다면 영국 왕은 아닌게 아니라 왕이면서 벌써부터 왕이 아니었었다. 「어록」을 빌면 직업인이다. 그러니까 왕이 왕이길 그만 두면서 왕가 수명은 길어졌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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