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바람이 전하는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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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연예인 가족이 왜 TV에 자주 나오죠?”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라며 맞장구 칠 수 없는 이력이라 궁색하나마 답변을 한다. “채널이 늘어나니 시간을 채우기 어렵지 않겠어요? 콩에 낯이 익다 보면 콩밭에도 눈길이 머물 거라 기대하는 거겠죠.” 얄팍한 순발력이 궁핍한 창의력을 메울 순 없다. 시청자가 아니라 시청률을 중시하다 보니 급기야 ‘연예인 가족 총동원령’까지 발동한 것 아닐까.

 채널들은 언젠가부터 ‘말 잘하는 아저씨들’에게도 화면을 양도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정치평론가들은 주로 낮에 집단으로 활동한다. 겹치기 출연도 예사다. 동업자끼리 경쟁하면서 시청률 올리는 법을 터득한다. 어떤 이들은 정치를 스포츠처럼 해설한다. 선거 직후 3전4기라는 말이 화제였다. 중학생은 궁금할 것이다. “4전3승, 4전3패는 있는데 4전3기는 왜 없지?” “그래서 한자 공부가 필요해. 일어나려면(起) 먼저 넘어져야(顚) 하기 때문이야. 넘어져도 계속 일어나려면 속으로 3가지를 다짐해야 돼. 진실함과 간절함과 꾸준함. 한문수업에 인생까지 배우니 넌 낙엽 쓸면서 돈까지 줍는 거다.”

 내친김에 홍수환 선수의 4전5기 기록을 들춰본다.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수퍼밴텀급 초대 타이틀 결정전. 2회에 4번 다운된 뒤 3회 KO승을 거둬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비운의 상대는 카라스키야. 역전의 명수는 그 스토리 하나만으로도 강연 한두 시간을 너끈히 채운다. 젊어서 도랑 치고 황혼에 가재 잡는 사람이 부럽다.

 정치평론가의 언어영역은 경계가 모호하다. 가끔은 기상캐스터를 방불케 한다. 선거 후폭풍에 역풍이라는 말도 자주 들린다. 이왕 넘나들었으니 ‘기상심리학’적으로 접근해보는 건 어떨까. “지금 넘어지고 바람 맞은 자들은 들으시오. 바람의 진원지는 그들이 아니라 그대 마음이오. 그런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그런 바람에 휘말리게 된 것이오. 고개는 숙이되 생각은 멈추지 마시오. 이 바닥에선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듯 보여도 다시 바람과 함께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된다. 작가인 마거릿 미첼이 애초에 소설 제목으로 쓰려 했다는 그 유명한 말. 지금 뒷줄로 자리를 옮기는 이들에겐 자칫 위로보다 실례가 될지 몰라 조심스럽긴 하다. 어찌됐든 오늘은 스칼렛(비비언 리)의 대사로 마무리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Tomorrow is another day).”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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