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 527억 날릴 뻔한 소송 … 러시아통 변호사가 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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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보안국(FSB·옛 KGB)이 이 소송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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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9일 러시아 모스크바 도심 루뱐카 지역에 위치한 러시아 지적재산권 법원. 상고심 첫 재판에 들어가는 법무법인 율촌 소속 이화준(34·사진) 러시아 전문 변호사에게 말총머리를 한 백발의 러시아 변호사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군사기술 유출 소송 전문가로 FSB 사건을 주로 맡아 온 안드레이 페도토프였다. “우리 군사기술로 외국인들이 막대한 이득을 봤는데 러시아 법원이 그냥 놔둘 것 같으냐”는 그의 말엔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FSB 청사가 차로 5분 거리에 있기도 했지만 그의 말은 엄포로 들리지 않을 만큼 무게감이 있었다.

 이 변호사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의뢰로 러시아 군사기술연구소 PKMB(펜자연구소 후신)가 2004년 KAI와 두산인프라코어 등을 상대로 낸 527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의 변론을 맡은 건 지난해 10월. 1심이 PKMB 측 전부 승소로 결론 난 직후였다. 이 변호사는 국제분쟁해결팀·지적재산권팀 소속 변호사 9명으로 팀을 꾸렸다. 군사기술과 직결된 민감한 사안이어서 모든 의사소통은 인터넷전화인 스카이프를 통해서만 했다. 도청을 우려해서였다. 초등학교 때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과를 졸업한 이 변호사는 러시아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다. 클리퍼드 챈스 등 해외 로펌의 러시아사무소에서 근무하다 2008년 율촌에 스카우트됐다.

 처음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KAI의 전신 대우중공업 시절인 1990년대 후반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한국 공군의 훈련기인 KT-1과 조종사 훈련용 시뮬레이터 개발 프로젝트에는 펜자연구소 출신 러시아 엔지니어들이 합류했다. 개발이 완료된 뒤인 2000년 초 러시아 검찰은 펜자연구소 소장 등을 군사기밀 유출 혐의로 수사했다. 이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4년 후 PKMB가 “조종사 훈련용 시뮬레이터에 펜자연구소 기술이 도용됐다”며 소송을 냈다. 1심 러시아 중재법원은 기술 도용이 인정된다며 KAI에 527억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이 변호사가 항소심(제9항소법원)을 맡았으나 결과를 뒤집지 못했다.

 반전의 서막은 지난달 9일 올랐다. 첫 상고심 변론을 들은 지적재산권법원 알렉산드르 스네구르 재판장이 “러시아에서 가장 길게 끌었던 민사소송인 만큼 쟁점을 더 챙겨 보겠다”며 재판을 두 번 더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통상 한 번의 기일을 열고 바로 선고하는 러시아의 상고심 관행상 이례적인 일이었다. 해당 프로그램에 펜자연구소의 일부 기술이 사용된 것은 맞지만 원래 기술 자체가 펜자연구소에서 개발됐다는 증명이 없는 점, 러시아 측 연구원들이 당시 대우중공업에 채용된 상태였던 점 등을 파고든 전략이 주효했다.

 선고가 내려진 것은 지난달 30일. FSB 관계자들이 방청석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페도토프 변호사의 최후변론은 날이 서 있었다. “한국 기업이 우리 기술을 훔쳐갔다.” 이에 맞서 이 변호사는 “사법부의 독립성과 신뢰가 러시아에 대한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될 것”이라며 법리에 입각한 판단을 요청했다. 선고 결과는 이 변호사의 완승이었다. 재판부는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1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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