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 바꿔 빠른 공격 유도 … 한국 농구 르네상스 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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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출신답게 공 만지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김영기 KBL 총재. [김형수 기자]

78세. 새 일을 벌리는 게 쉽지 않은 나이다. 한국 농구의 원로 김영기는 새 도전에 나선다. 프로농구를 관장하는 제8대 한국농구연맹(KBL) 총재가 그의 ‘오래된’ 새 직함이다.

 서울 강남구 신사역 1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KBL 센터. 지금은 주변에 높은 건물이 많이 생겨 묻혔지만, 한동안 빌딩 상단 농구공 모양이 돋보였던 신사역 주변의 랜드마크였다. 이 빌딩은 김영기 총재가 장만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김 총재는 1996년 한국 프로농구 출범의 주역이다. 초대 수장은 윤세영 총재가 맡았지만 실무는 그가 주도했다. 시원하게 덩크를 꽂는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고, 지금은 일반화된 타이틀 스폰서 유치에도 프로농구가 앞장섰다. 한국에서도 프로 스포츠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가 부총재로 있던 2002년 매입한 건물이 KBL센터다. 당시 240억 원에 구매한 이 빌딩의 가치는 두 배 정도 뛰었다.

 취임식을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KBL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김 총재는 “프로농구가 출범 초에는 정말 인기가 좋았다. 덕분에 이런 건물도 샀다. 10개 구단으로부터 5억원씩 갹출하고 나머지는 KBL 자금으로 마련했다”고 자랑했다. 다시 한 번 프로농구의 전성기를 만들어 달라는 게 그를 다시 이 자리로 불러낸 농구계의 뜻이다.

 그는 한국 농구의 전설 같은 존재다. 특기생 입학이 아니라 시험을 쳐서 1955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농구 선수 출신인데 어떻게 이런 점수를 받았냐며 면접 때 영어시험을 다시 보게 했다”며 껄껄 웃었다. 그가 농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대학 1학년부터다. “실력이 너무 빨리 늘어서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나와 농구가 참 잘 맞았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김 총재는 56년 멜버른 올림픽, 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64년 도쿄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대표팀 감독을 거쳐,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체육계 뿐만 아니라 금융인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기업은행 지점장을 거쳐 신보창업투자 대표이사를 지냈다.

 농구계를 떠날 때도 불 같았다. KBL 전무와 부총재를 거쳐 3대 총재로 재임중이던 2003년 SBS와 KCC 경기에서 판정 시비가 발단이 돼 경기를 마치지 못하고 몰수 게임이 선언됐다. 김 총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모든 게 내 책임”이라며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농구계에서 뒤늦게 만류했지만 뜻을 꺾지 못했다.

 프로농구의 인기는 예전같지 않다. 김 총재는 남 탓을 하지 않았다. 그는 “요즘 농구가 재미없다”고 일갈했다. “마이클 조던과 르브론 제임스가 와도 한국 프로농구에서는 안 통할 것”이라며 수비에만 매달리는 최근 트렌드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속공을 끊는 파울을 한 선수를 두고 뭐라고 하나. ‘잘 잘랐다’고 칭찬한다. 이건 말이 안 된다. 팬도, 선수도 신나게 할 수 있는 농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판정과 규정 변화를 통해 빠른 공격 농구를 하면 자연히 팬과 예전의 인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또 “프로농구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며 “흩어지고 무너진 기본을 추스르고, 나뉘고 쪼개진 마음을 한데 모아 최고 인기 스포츠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혼신의 뜀박질을 시작해야한다”고 농구인들에게 당부했다.

 혈색이 좋은 김 총재에게 건강 비결을 묻자 “얼마전 골프 79타를 쳤다”고 했다. 에이지 슈트(나이와 같은 골프 타수)에 한 타 모자라는 스코어다. 임기는 3년. 2017년 6월 30일까지다.

글=이해준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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