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합의에 떨떠름한 미국 "일본 정부에 물어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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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과 북한이 납북자 문제에 합의했다. 미국 정부 입장은 뭔가.

 “글쎄. 그 합의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일본 정부에 물어봤으면 한다.”

 -합의 결과 6자회담 참가국 중 하나인 일본이 대북 제재를 완화하는데.

 “그 문제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할 내용이 없다.”

 미 국무부 젠 사키(사진) 대변인과 기자들이 지난 29일(현지시간) 정례브리핑 시간에 주고받은 문답의 일부분이다. 평소 상냥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던 사키 대변인이다. 하지만 북한과 일본 두 나라가 일본인 납북 문제 재조사에 합의한 내용을 묻는 질문에는 극히 절제된 답변만 했다. “일본 정부에 물어보라”고 말할 땐 표정도 심드렁했다. 워싱턴 외교소식통은 “정부 대변인이 ‘다른 나라 정부에 물어보라’고 답변하는 건 이례적인 경우”라며 “외교화법에선 보통 ‘난 잘 모르니 그쪽에 물어보라’는 뉘앙스로, 불만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국무부 직원은 “일본 정부와 사전에 협의한 일이 없었다”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공식 발표하기 직전 일방적으로 통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키 대변인도 같은 대답을 했다. 그는 일본이 사전에 통보했느냐는 질문에 “미리 전달받았다”면서도 일본의 대북 제재 완화와 관련해선 “(일본 정부의) 계획에 대해 어떤 확인도 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북·일 합의를 지켜보는 미국의 시선은 떨떠름하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북한 비핵화를 위한 동맹국들과의 공조에 지장을 주는 형태가 돼선 안 된다는 경계심이 배어 있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일본은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한국·미국과 긴밀히 조율했어야 한다”며 “투명성을 유지하는 건 관련국 간 신뢰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키 대변인은 “미국 정부는 일본이 납치 문제를 투명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지한다”며 ‘투명하게’란 대목을 각별히 강조했다.

 일본 언론들도 우려를 나타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북한과의 납치 문제 재조사 합의와 관련해 “북한이 진지하게 조사할지 보증이 없는 상황”이라며 “북한과의 교섭은 외교적 위험을 동반한다. 아베 총리가 정권의 명운을 좌우할 정도의 큰 도박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특히 “북한의 최대 후원자였던 중국도 북·중 정상회담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미국이 목표로 하던 ‘대북 포위망’을 구축할 호기”라며 “일본과 북한의 접근은 일본 외교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북공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미국과의 사전 협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외교 루트를 통해 여러 가지를 (조정)하고 있다”고 답했다. ‘북한 문제 대응에 일본과 미국 간 보조가 안 맞는 것 아니냐’는 질문엔 “전혀 그렇지 않다”면서도 “하나하나 미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워싱턴·도쿄=박승희·서승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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