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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리' 있는 세상에 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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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20대 이하는 모를 수 있다. 시시때때로 “으리(의리)”를 외치는 배우 김보성(48)이 한때는 꽤 상큼한 하이틴 스타였다는 사실을. 본명인 ‘허석’으로 출연했던 강우석 감독의 1989년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서 그는 입시경쟁에 지친 여주인공(이미연)의 곁을 지키는 우직하고 귀여운 남학생을 연기해 소녀들의 맘을 설레게 했었다. 당시 이 영화에 푹 빠져 그를 ‘오빠’로 모실까 말까 고민했던 이로서, 언젠가부터 과격하고 코믹한 이미지로 굳어진 그가 한없이 안타까웠다.

 지난 주말, 그 덕분에 오랜만에 박장대소했다. SNS를 통해 큰 화제가 된 식혜 음료브랜드의 바이럴(viral·입소문) 광고를 보면서다. 1분40초짜리 이 광고에서 그는 느닷없이 쌀가마니를 후려치며 “우리 몸에 대한 으리(의리)!”, “전통의 맛이 담긴 항아으리(항아리)!”, “신토부으리(신토불이)!”라고 소리친다. “아메으리카노(아메리카노)”나 “에네으리기음료(에너지음료)” 대신 “으리음료(우리음료)”를 마시라며 식혜를 몸에 들이붓기도 한다. 그의 평소 이미지와 제품 컨셉트를 코믹하게 결합한 이 광고는 12일 유튜브에서 200만 건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으리 놀이’에 동참한 이들이 만든 ‘모나으리자(모나리자)’, ‘레으리잇고(렛잇고)’ 등의 패러디물도 등장했다.

 어찌 보면 ‘엽기 코드’를 잘 활용한 성공한 광고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보성이라는 인물을 새삼 다시 보게 된다. 그동안 꾸준히, 나 같은 이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캐릭터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큰 호응은 힘들지 않았을까. 거기에 세월호 사건에 힘을 보태고 싶다며 어려운 형편에 1000만원을 대출받아 몰래 기부했다는 사연 등이 그의 ‘으리’에 어떤 ‘진심’의 무게를 더한다. 그의 ‘어록’도 곱씹게 된다. “사적인 야망이 아닌 공익을 위한 야망을 갖고,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MBN스타와의 인터뷰)라든가, “‘의리’라는 것은 잠재돼 있던 대중의 목마름이 아닐까 생각한다”(JTBC ‘유자식상팔자’) 등이다.

 국어사전에는 ‘의리(義理)’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 적혀 있다. 과장된 허풍처럼만 느껴지던 한 배우의 ‘으리 타령’이 사뭇 절절하게 들리는 건, 소리 내 웃기도 미안한 시절을 살고 있어서일지 모른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잊은 이들이 만들어 온, 우리 사회의 흉측한 현실을 매일 직면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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