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제 묻어 둔 요식 극|막 내린 5개 시은 주총…그 언저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시중은행의 경영부실도, 임원 진들의 무책임도, 또 총회 꾼 들의 사꾸라도 여전하다. 주인 없는 시은은 계속 표류하고 있고 정부나 은행경영진들은 이를 즐기고 있는 듯 하다. 금융사상 처음으로 감사원이 전 은행을 집중감사, 엄청난 변태지출을 적발했다 하여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되고 은행원들의 집단이직사태가 나는데도 시은은 계속 평온하다. 누구 한사람 책임을 따진 사람도 없고 책임진 사람도 없다.
주주총회에선 오히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경영진들이 침식을 잃고 애쓴 결과 이 정도의 실적을 올렸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총회 꾼 들도 이제 완전히 관록이 붙어 사꾸라 기술에서는 프로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번 시은 주 총에선 경영실적에 따라 차등배당을 했다. 상은·한일 은이 연 16%이고 조흥·제일·서울 은이 15%이다.
그러나 주주도, 임원진도 은행경영을 잘해 16%의 배당을 하고 잘못하여 15%의 배당을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은행의 경영실적은 임원진의 수단이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정부가 얼마큼 보아주느냐에 달렸다고 굳게 믿고 있다. 경영실적이 안 좋아 15%의 배당을 하게 된 J은행에서 P주주는『그동안 현 행장이 그토록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워낙 떠 안은 골칫거리가 많기 때문에 다른 은행에 비해 실적이 뒤떨어지는 것같이 보이나 실은 경영을 아주 잘한 것』이라고 은행장을 위로하기까지.
이에 대해 사회 보던 행장은『사실 경영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정부에서 15%의 배당을 하라 하니 기분이 안 좋아 항의까지 했다』고 맞장구를 쳤다.
뒤이어 다른 주주가 일어나 정부의 졸렬한 정책을 한바탕 성토한 다음 민간 주엔 연 16%의 배당을 하는 대신 정부엔 10%만 배당을 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은행장은 『정부에 15%의 배당을 하는 것과 10%의 배당을 하는 차이는 불과 1억원 미만인데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면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정부사람의 펜대 하나 늘리는데 몇 억원이 왔다 갔다 한다』고 경고했다. 누구하나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관치 금융의 생리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75년 상반기의 5개 시은순익 82억원 중 한은의 지준 부리가 72억원이나 되니 정부에서 지준 부리를 얼마로 주느냐 정하는 데 따라 은행의 경영실적이 결정되는 것이다. 주주들도 은행장을 상대로 경영실적을 따져 봤자 별 소용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기 때문에 정부성토만 만발했다.
요즘 말썽이 된 시간외수당 삭감이나 집단이직사태에 대해서도 완전히 정부의 횡포로만 돌렸다.『요즘 은행원들의 사기가 어느 정도인지 솔직히 말해보라』고 어느 주주가 묻자 Y행장은『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은행원들의 사기가 높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시간외수당 등 봉급 삭감에 대해선 『물론 봉급이 줄어드니 은행원들에게도 어려움이 많겠지만 지금 거국적으로 서정쇄신운동이 추진중인데 은행원만 어찌 옛날 같을 수가 있겠느냐』고 행장이 한마디하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시끄러운 총회 꾼들도 거국적인 서정쇄신운동에만은 일체 시비를 걸지 않았다. 새로운 총회 꾼상이 정립된 것 같았다.
총회 꾼들은 완전히 긍정적·협조적 자세로 바뀌었다.
사회자인 행장과 호흡을 맞춰 가며 총회를 각본대로 끌어가는 덴 탁월한 연기를 보였다. 때로는 고함도 지르고 때로는 칭찬도 하고 또 까다롭게 구는 주주들의 발언도 봉쇄하면서 집행부를 눈물겹게 감쌌다.
이제 총회 꾼 들은 총회집행에 있어서 필요악적 존재가 되었다.
5개 시은 중 경영실적이 가장 나쁜 서울은행이 1시간이 안되어 총회를 끝낼 수 있었던 것도 다 총회 꾼 들의 덕택이었다. 총회 꾼들은 10여 년의 관록을 자랑하는 똑같은 면면들로서 총회장마다 다니며 사꾸라를 만발시켰다.
특히 이번 총회에선 인사 이동이 소폭에 그쳐 더욱 순조로 왔다.
시은 주총은 이제 감독 재무부, 주연 은행장, 엑스트라 총회 꾼 들의 요식 극이 되어 버렸는데 이번 주 총은 그동안 금융계를 뒤흔든 파경에 비해선 너무나 단조롭고 싱겁게 끝났다.

<최우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