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더는 없다더니 하루 만에 다시 낙하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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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업무보고에서 현오석 부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기업 낙하산 방지 대책을 보고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를 막겠다는 정부 발표가 무색해졌다.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의 낙하산 임원을 막겠다며 20일 ‘자격기준’을 도입하겠다고 한 뒤 ‘친박’으로 꼽히는 정치권 인사들이 줄줄이 공공기관 임원에 임명됐다.

 21일 정부는 이상권(59) 전 의원을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에 임명했다. 검사 출신인 이 사장은 인천 계양을에서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왔을 때 경선대책위원회 인천총괄본부장을 지냈다. 지식경제위원회(현 산업통상자원위원회) 등 에너지 분야 상임위에서 2년 활동했을 뿐 전기안전 분야 경력은 찾기 어렵다.

 청와대가 이 사장을 전기안전공사 수장으로 낙점한 것은 18일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18일 이전에 이 사장을 사장 후보로 청와대에 추천했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공공기관 낙하산 방지를 위한 자격기준 도입안을 마무리하면서 낙하산 인사를 추천한 셈이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보통 공공기관장은 임명 발표가 나오고 며칠 뒤 취임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그런데 20일 이전에 이 사장 임명 사실이 발표되면 기재부의 낙하산 기관장 방지책에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어서 이 사장에 대한 공식 임명과 취임을 같은 날로 맞춘 것 같다”고 말했다. 부채비율이 222%(부채 금액 1363억원)에 이르는 전기안전공사의 사장 연봉은 1억2000만원이다.

 23일 임명된 홍표근(61) 한국광물자원공사 감사도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의 선거대책위 공동여성본부장을 맡았다. 홍 감사는 과거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줄곧 충청권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2012년 부여-청양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떨어졌다. 홍 감사 역시 광물자원 개발에 관련한 경력이 없는 인물이다. 광물자원공사는 2012년 890억원의 적자를 냈지만 감사 연봉으로 8000만원을 지급한다.

 같은 날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한국동서발전 감사에도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에서 활동한 강요식(53)씨가 임명됐다. 육사를 졸업한 그는 소령 전역 후 국방부 장관정책보좌관(2007~2008년)과 한나라당 부대변인(2008~2009년)을 거쳤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구로을에서 낙선했다. 지난 대선에선 새누리당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소통자문위원장을 맡은 그는 대선 직전 『박근혜 한국 최초 여성 대통령』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강 감사가 받을 연봉은 9600만원이다.

 이상권 사장뿐 아니라 홍표근·강요식 감사도 기재부가 낙하산 방지책을 준비하는 동안 내정 통보를 받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때문에 정부가 20일 공공기관 낙하산 근절에 대한 의지를 나타냈다면 이들에 대한 인사도 다시 검토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낙하산 임원을 막겠다는 정부 의지가 약하다는 게 드러난 것”이라며 “대통령의 선거 공신에겐 다 자리를 하나씩 준 뒤, 정부가 있으나 마나 한 낙하산 방지대책을 만들어 발표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비판했다.

세종=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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