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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영, 안철수에 훈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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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원혜영 민주당 의원 같은 사람. 여의도엔 지금 멸종 위기다. 그는 31살 때(1981년) 풀무원을 만들었다. 데모를 마음껏 하려고 잘나가는 풀무원을 경복고 동창 남승우에게 맡겼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자 지분을 정리해 전액 장학재단에 기부하곤 전셋집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요즘 돈으론 100억원이 넘는다. 안철수 의원이 작년에 그와 만났다.

 ▶안철수=“새 정치를 하려는데 선배님께서 한 수 가르침을….”

 ▶원혜영=“신의 한 수 같은 건 없소 안 의원. 사실 나는 안되는 일은 골라서 다 해본 사람이요. 그중 하나가 당신이 말하는 새 정치였지.”

 ▶안철수=“?”

 ▶원혜영=“‘한겨레민주당’이라고 기억하시나.”

 87년 체제 이후 한국 새 정치의 효시다. 야권의 예춘호(87), 조순형(77) 등이 당시 소장파 제정구(작고), 유인태, 원혜영, 김부겸 등과 함께 88년 총선을 앞두고 만든 정당이다. 분열로 노태우에게 정권을 내준 YS, DJ에 반대하는 세력. 원혜영은 대변인이었다. 이 정당의 모태는 제정구를 대표로 한 ‘새정치추진모임’. 안철수신당의 추진기구(‘새정치추진위원회’), 당명(‘새정치연합’)과 뒤 몇 글자만 다르다.

 ▶원혜영=“우리도 처음엔 기대를 받았지. 하지만 정치는 떼거리로 하는 것. 선거야말로 떼거리 정치의 극치지. 한겨레민주당엔 솔직히 5등짜리들만 모이더군. 1, 2, 3, 4등은 노태우의 민정당, YS의 통일민주당, DJ의 평민당, JP의 공화당으로 나눠 갔소. 거기도 못 간 ‘기타’들만 왔지. 나중에 유권자들이 ‘이게 무슨 새 정치야?’, 이렇게 말하게 되더군.”

 ▶안철수=“….”

 ▶원혜영=“이상과 현실의 괴리요. 양적 팽창을 도모하면 질적 저하가 필연적인.”

 원혜영의 지역특강을 토대로 재구성한 대화 내용이다. 그의 말대로 한겨레민주당은 처음엔 기대를 모았다. 영화 ‘반지의 제왕’ 속 ‘반지원정대’ 느낌이 났다. 그러나 ‘새정치 원정대’엔 갈수록 정치권 주변의 보따리장수, 약장수, 백수건달이 꼬였다. 63명이 총선에 출전해 한 명만 호남에서 살아남았다. 간달프(예춘호), 프로도(제정구)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원혜영은 부천 남구에서 6등을 했다. 새 정치를 하겠다던 호남 생존자는 당선 후 냉큼 DJ당으로 보따리를 쌌다. 간판을 3년 만에 내려야 했다.

 오늘 또 하나의 ‘새정치 원정대’가 발진했다. 간달프가 윤여준으로, 프로도가 안철수로 바뀌었다.

 너무 많은 새 정치가 출몰해 몇 번째인지조차 모르겠다. 유한킴벌리당(당수 문국현), 칭(稱)박당(친박연대)까지 기억은 가물하지만 창당 명분은 비슷했을 것이다. DJ조차 당명에 새 정치(새정치 국민회의)란 단어를 붙인 적이 있다. 신당의 누군가 ‘백년정당론’을 말했다. 역시 기시(旣視)감이 있다. 열린우리당이 백년정당 운운했다가 5년도 안 돼 문을 닫았다. ‘천년정당’을 표방한 새천년민주당도 있다. 이번 원정대만큼은 ‘권력’이라는 ‘절대반지’를 민심의 가운데로 무사히 운반하길 빈다.

 그러나. 신당은 창당선언문에 민주적 시장경제, 자본과 노동의 상생, 정의로운 복지국가, 평화통일, 삶의 정치, 상식과 합리 등등등 좋은 말들을 다 올려놓았다. 설마, 바쁜 국민에게 그걸 다 기억하라고? 다른 정당도 다 하고 있다는 걸 좌판에 쭉 나열하는 것보단 ‘새 정치는 뭐다’라는 임팩트 있는 한마디가 아쉽다.

 또 있다, 아쉬움이. 출마한다 안 한다, 말이 많은 일부를 보면 정말 결기(決起)한 건지, ‘알바’ 뛰는 건지….

 무소속 박주선 의원을 놓고 민주당과 영입 경쟁을 하고 있는 것도 황당하다.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의원직 상실형만 면하고 유죄를 받았던 정치인이 그다. 이런 게 새 정치? 그럼 뭐가 헌 정치?

 신당은 원혜영의 훈수를 잊었다. 사실은 훈수가 아니라 경고였다. 분별없는 양적 팽창은 필연적인 질적 저하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