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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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30명이 넘는 시민을 인질로 삼고 명동 한복판에서 난동을 부리던 범인 3명이 20시간만에 잡혔다.
그들은 결국은 돈과 향락을 위해 범행을 저지른「통·기타」족이다. 거의 모든 인질난동 극이 그랬듯이 이번 범행의 귀착점도 다방이었다.
다방은 아마 그들이 생각할 수 있던 가장 화려한 무대였기 때문일까? 관객을 많이 끌기를 바랐다는 것도 혹은「통·기타」족의 생리에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 난동 범을 잡는데 공이 컸던 다방의「디스크·자키」도 같은「통·기타」족이다. 이들을 갈라놓은 것은 뭣 이겠는가.
「나치」독일 때「바이마르」에 가까운 곳에「부헨발트」강제수용소가 있었다. 이 속에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이 수용소의 한 구석에는『「괴테」의 나무』라고 불려지는 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다. 이 나무그늘 아래에서 1백수십년 전에「괴테」는 인간의 미래에 관한 사색에 곧잘 잠겼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학살을 당하기 직전에 이곳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이 나무를 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학살을 즐기던 사람들의 눈에는 또 이 나무가 어떻게 보였을지도 매우 궁금해진다.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은 또 하나 있다.「괴테」나「괴테」의 나무아래서 학살을 즐긴 사람이나 학살당한 사람들이나 모두 다 같은 독일인들이었으며, 다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수수께끼는 예부 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통하게 풀어준 철학자도, 심리학자도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괴테」처럼 얼마든지 고매해질 수 있는가하면 동시에 또 얼마든지 학살하는 쪽에 가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선량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얼마든지 잔혹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아무리 악과 폭력에의 충동을 느낀다고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 게 인간이다. 인간을 악으로부터 멀리하게 만드는 것이 또 교양이며 양식이며 분별 같은 것이라고들 한다.
이런 분별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것이 청소년이다. 악에 물들기 쉽고 폭력에의 유혹을 느끼기 쉬운 것이 청소년이다.
이번 난동 극의 주역들은 돈 때문에 범행을 했다. 만약에 이들에게 돈이 있었다면 그런 범행은 하지 않았으리라는 추론이 나온다. 그렇다고 또 다른 형태의 범행의 동기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괴테」의 나무가 뿌리깊이 박혀있어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나무는 학살당하는 사람들에게 내일에의 희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당국에서는 청소년선도를 위한 범국민운동을 벌이겠다고 한다. 그것은「괴테」의 나무처럼 무력할지는 모른다. 당장에 성과가 있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괴테」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운동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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