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예 기자의 위기의 가족] 남편의 주식 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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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 칸트

얼마 전 신년 모임에서 이벤트를 했습니다. 참가한 기자들에게 각각 다른 ‘명언’이 적힌 쪽지를 나눠주고, 같은 글귀가 있는 사람에게 작은 선물을 주는 거였는데요. 우연히도 제가 뽑았던 종이엔 이런 글이 적혀있더군요. 물론 저는 당첨되는 행운은 누리질 못했습니다.

이제 곧 민족 대명절인 ‘설’인데, 여러분은 어떤 행복을 꿈꾸고 계시는지요. 이번엔 인생의 한방, ‘대박’을 노리는 남편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해봅니다.

‘세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더니’ 대박만 좇는 남편의 주식투자. 빚더미에 오른 우리집

#아내의 이야기

“기다려, 이번엔 진짜야.”
10년을 살아도 남편 입에서 떨어지는 소리는 같다. “이번엔 정말”이라고, 운을 떼는 그 사람. 매번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왜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연애를 한창 할 땐 정말 몰랐다. 그 사람이 주식투자에 푹 빠져있다는 것을 말이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그가 처음 했던 말이 “이번만 대박 나면”이었다. 그땐 단순히 모아놓은 돈이 꽤 있어서, 주식에 투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미 그가 주식으로 날려버린 돈이 기천만원쯤은 된다는 거였다. 집 한 채도 구할 돈이 없어, 어린이집 선생님을 하며 모아온 1200만원에, 남편이 대출받은 1000만원을 보태야 했다.

결혼하고도 남편의 주식 사랑은 끝나질 않았다. 대개 “이번은 정말 고급정보”라며 시작을 했고, 나 몰래 대출받아 한 주식 때문에 빚 독촉에 시달렸다. 울며불며 매달리기도 했고, 친정에서 도움을 받아 대출금을 갚아보기도 했지만 그 버릇은 사라지질 않았다.

“어딜 삐딱하게 봐?”

3년 전. 잔뜩 술에 취한 남편이 초인종을 눌렀다. 다세대 주택 단칸방에 살면서, 아직도 ‘한방’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남편. 이번엔 진짜라며 투자했던 돈을 또 다 날린 모양이었다. 술냄새를 풍기는 그를 흘깃 봤을 뿐인데, 남편은 트집을 잡았다. 삐딱하게 봤다는 이유로 남편은 술병을 들고 겁박을 했다. 목덜미 근방까지 날아온 술병. 자칫 제대로 맞기까지 했더라면, 한밤중 구급차 신세를 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당탕 큰소리가 나면서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가 놀라 자지러졌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내가 죽기라도 하면 아이는 어쩌나’ 싶은 마음에 짐을 쌌다.

“‘직장 그만두면 이혼한다’, ‘이성이 생기면 문제 삼지 않는다’ 각서까지 썼는데”

#남편의 이야기

집을 나간 아내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각서였다. 내용은 이랬다.
“아내가 요구하면 이혼한다. 양육비로 이혼 전까지 월 70만원, 이혼 후 아이가 초등학교까지는 월 50만원, 중학교 70만원, 고등학교 100만원을 지급한다. 기간 내에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면 곧바로 이혼 소송을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화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아내를 괴롭히지 않는다. 집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각각 이성이 생겼을 때는 이를 문제삼지 않는다.”

주식으로 계속 돈만 날린 것도 아니었다. 한때는 수익이 몇 달 만에 1500만원이나 나기도 했다. 주식 때문에 빚이 7000만원까지 불어나면서 결국 법원에 개인회생 신청을 했다. 매달 월급에서 170만원씩을 갚는 조건이었지만, 빚을 갚기도 빠듯했다. 월급이 턱없이 적었던 터였다. 결국 빚 2000여만원을 못 갚게 되면서 궁지에 몰렸다.

아내와 크게 다투게 된 건 제사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큰 아들인 내가 제사를 모셔야 했다. 아내는 빚부터 갚고 형편이 나은 남동생들에게 맡기자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엄연히 내가 장남 아닌가. 화가 치솟아, 아내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그 일로 우리는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집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아내는 나를 벌레 보듯 봤다. 술김에 아내를 술병으로 위협한 건 잘못한 일이지만, 늘 구실을 주는 건 아내였다.

아내는 집을 나가서도 동생들에게 당당히 “별거한다”며 “집 구할 돈을 달라”고 했다. 동생들이 1000만원을 마련해 준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는 각서를 요구했다. “각서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아들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거였다. 이런 망신이 세상에 또 어디 있나.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내는 포기할 수 있어도, 하나뿐인 아들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남편, 부부로서 의무 게을리 해”

#법원의 판단은

별거 기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은 아들을 그리워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귀가 중 술을 한잔 걸친 남편은 아내의 집을 찾아갔다. 남편이 대문을 힘껏 두드릴수록 아내는 문을 굳게 걸어 잠갔고, 경찰을 불렀다. 남편은 이 일로 분노해 아내에게 폭언과 욕설이 담긴 문자를 보냈고 참다못한 아내는 결국 이혼 소송을 냈다.

부산가정법원은 아내의 이혼 소송에 “남편은 아내에게 위자료 1000만원을 주고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남편의 주장처럼 주식 투자의 결과가 좋았다면 그 과실을 가족들이 누렸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 초부터 주식 채무로 갈등을 겪어 왔다면 이후엔 충분히 아내와 상의해서 투자를 결정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대출까지 받으면서 주식을 했고, 그 과정에서 아내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 가계를 설계해야 할 부부의 의무를 게을리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법원은 아이의 양육권은 아내에게 줬다. 양육비에 대해선 남편이 직장을 다니면서 신용회복 절차에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 법원은 “신용회복 절차에 따른 변제가 완료되는 시점까지는 월 50만원을, 그 다음부터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월 70만원을 매월 말일에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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