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휴전회담(후반부)(10)|반공 포로 석방(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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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18반공 포로 석방의 작전 전개 과정은 비교적 간단했지만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역사적 의의는 실로 막중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유엔」군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 공산 침략을 물리치고 이 기회를 십분 이용, 한민족의 지상 명제인 통일을 이룩해야겠다는 확고한 결의가 서 있었다.
더욱이 이승만 대통령은 이같은 기호의 기회를 놓치고 휴전이 외세에 의해 타의적으로 성립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시당하는 일이니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통일에의 집념과 한·미 외교의 흥정 등을 배려한 일련의 휴전 반대 시위를 전개했는데 이 가운데서도 반공 포로 석방은 한국이 현대 국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행한 대외적인 일대 주권 행사였던 것이다.

<국군 헌병이 탈출을 지시>
6·18 반공 포로 석방 당시의 세계 여론은 한국 정부에 몹시 비판적이었고 심지어 영국의 「처칠」수상은「유엔」이 이승만 대통령을 체포, 구금해야 한다고 까지 극언했지만 결국 전세계는 이것이 올바른 지지었음을 깨닫고 세기적인 쾌거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원래 반공 포로 수용소는 한-미 헌병이 공동으로 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석방 극의 막이 오르면서 미국 정부의 뜻을 받들어 이를 제지하려는 미군과 한국군 헌병들간에는 혈맹의 우군 사이가 잠시 적대 관계(?)로 돌변, 미 경비 헌병들의 눈에 고춧가루 세례를 가하기도 하고 몸을 결박하는 등 온갖 비상수단이 동원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미군간에 총 격전 같은 부상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헌병 총사의 석방 작전 계획과 실행은 끝까지「극비」가 철저히 보장됐기 때문에 수용소 안의 반공 포로들은 모두 까맣게 몰랐으며 겨우 반공 청년단 간부나 포로 여단장들만이 석방 몇 시간 전에 탈출 지시를 받았을 뿐이었다.
다음은 전회에 이어 논산·광주 수용소에서 석방된 반공 포로들의 탈출 담과 영천 수용소의 포로 석방을 지원했던 국군 헌병의 이야기.
▲이승현씨 (당시 논산 수용소 <제 74연단>반공 포로=현 반공 청년회 제주 지부장·제주시 거주·53) <나는 50년 8월 26일 고향인 평북 신의주를 출발, 길고 도 먼 자유에로의 탈출 여로에 올라 그해 9윌20일께 울 진에서 미군한테 포로가 되었습니다.
52년 4월 좌우익 포로 분리 수용시 거제도에서 논산 수용소로 건너와 포로 자체 감찰 대장을 하면서 석방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6월17일 밤 국군 헌병 하사가 갑자기 부릅디다. 그 헌병 이야기인즉「뻰찌」를 줄 테니 철조망을 끊어 놨다가 내일 새벽 공포의 신호가 있을 때 동지들을 지휘해 탈출하라는 거예요.
나는 도저히 그의 지시가 믿어지지 않아 돌아와서 간부 회의를 열어 의논한 후 다시 그에게 장교를 보내서 우리들로 하여금 확인케 해 달라고 했더니 얼마 후 헌병 대위 한 사람이 오더군요.
틀림없음을 재확인한 후 탈출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갔습니다. 상오1시쯤 밖에서 공포 소리와 동시에 각 소대별로 조직해 놓은 결사대 요원들이 선두에서 철조망을 끊고 탈출을 시작했어요.
국군 경비 헌병들은 총을 쏴 전등들을 모두 깨뜨려 버리더군요.
철조망을 나서면서 부 터는 우리들의 탈출을 대기 중인 경찰과 민간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각 민가에 3∼4명씩 배치돼 우선 옷들을 농민 복으로 바꾸어 입었습니다. 간부 포로들은 강경 경찰서에서 모두 데려다가 경찰복을 입혀 탈출 포로들을 붙잡으러 나온 미군들 틈에 끼여 대원들을 잘 수습하라고 하데요.
민가로 들어간 탈출 포로들은 이튿날부터 모두 농민으로 가장, 논에 나가 모를 심어 주고 밥을 얻어먹으면서 3개월쯤 지내다가 대부분이 국군에 입대했어요.
논산 수용소의 미 탈출 포로 2천6백여 명과 탈출했다가 미군에게 잡혀 재 수감된 3백30여명의 반공 포로들은 모두 54년1·20 석방 때 나왔습니다.>

<「팬츠」바람에 하수구로>
▲최영걸씨(당시 논산수용소 반공 포로=현 논산서 전당포 경영 53)<나는 50년 8월 북한 공산군 육전대(해병대)에 입대, 훈련 도중 10윌17일 후퇴 명령을 받고 북으로 올라가다가 강서 에서 현호철(피살) 동지와 함께 자해 반란을 일으켜 소·부 소대장을 격투 끝에 사살하고 부대를 해산, 잔여 대원들을 지휘해「유엔」군에 투항하려다 간준 미군한테 포로가 되었습니다.
격투 중 현 동지는 거사했고 나는 포환이 한 개 떨어져 나가는 등의 중상을 입었으나 서울 출신 의용군들이 많았던 우리 소대원들이 들것으로 평양까지 데려다가 약품을 구해 응급 치료를 해 줘 살아났어요.
6·18석방 때는 전혀 눈치도 못 챘고 17일 밤 여단 간부와 마작을 하고 밤늦게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려는 데 대대장 연락병의『나가라』는 고함소리에「팬츠」만 입은 채 하수도 구멍으로 기어 나와 탈출했습니다.
상오1시쯤인데 친구가 오더니 지금 대원들이 철조망 너머로 보따리 째 물건들을 팔아먹느라고 야단이라기에 나가 보니 미군 헌병들이 그쪽을 향해 공포를 마구 쏴 뎁디다. 한 여단 간부한테 달려가 웬일이냐고 물어 봤더니 오히려 나한테 진상을 아느냐고 반문하데요.
이 순간 대대장 연락병이 달려오면서 빨리 탈출하라고 소리를 치기에 뛰쳐나갔는데 하여튼 내가 소속했던 제6대대는 탈출 지령 연락이 늦는 바람에 3분의1정도가 낙오되고 말았어요.
「팬츠」바람으로 탈출한 나는 논산군 채운면 양조잠 앞에서 석방 반공 포로들을 안내하는 소방대원들을 만나 민가로 배치를 받았어요. 18일 아침 농민 복과 밀짚모자를 얻어 쓰고 논두렁에 서서 보니까 미군「지프」들이 논산∼강 경간을 왔다갔다하며 공포를 쏴 대고 야단입디다.
채운 면에 배치됐던 우리 반공 포로 30여명은 18일 밤 다시 북서쪽으로 이동을 하려고 나섰다가 부여에 이미 미군들이 들어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논산 군 광석면 천 동리로 들어갔더니 양회명 이장이 한 집에 두 명씩 배치시켜 주데요.
7월말 국군에 입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산으로 나가 신검들을 받았는데 나는 불합격이 되고 말았어요. 하는 수 없이 논산으로 되돌아와 시장에서 참외 장사를 시작, 간신히 끼니를 이어 왔습니다. 이렇게 돼 논산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사는 중 나보다 먼저 월남한 동생을 만나 아주 정착해 오늘까지 살았습니다.>

<미「탱크」30대 겹겹이 포위>
▲정세교씨(당시 광주 수용소 반공 포로=현 전남 진도군 거주·장로교 전도사) <6월17일 밤도 철조망이 겹겹이 둘러싸인 수용소 안에서 동료들과 모여 앉아 영단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11시쯤 잠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전깃불이 환히 켜지더니 우리 대대 대변인 이지수 동지가 들어와『이 대통령의 특명이니 오늘 새벽2시 일제히 철조망을 뚫고 탈출들을 하시오. 국군이 공포를 쏠 테니 총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나가면 됩니다. 목적지는 화순·나주·보성·함평 등지로 가면 됩니다. 지금 시간이 새벽 1시이니 빨리 준비들을 하시오』라고 합디다.
2시 정각-. 정기홍 동지가 맨 앞에 서서 철조망을 제치고 나가면서 빨리 따라 오라고 소리를 치데요. 나는 몸이 쇠약해서 물밀듯 쏟아져 나가는 대열을 뚫지 뭇하고 처졌다가 우리 대대에서는 맨 나중에 나왔습니다.
내가 철조망을 나서자 어디에선가『사격 개시』라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기 시작합디다.
나는 겁에 질려 발이 굳어 붙은 채로 서 있었는데 국군 위병이 옆으로 다가와 한 손으로「카빈」방아쇠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치면서『빨리 뛰시오』하고 격려를 해주데요.
모내기를 시작한 논으로 뛰어들어 두 손을 짚고 기기도 하며 밤새 달려 동이 틀 무렵 무등산 밑에 이르렀습니다.
18일 하오 산에서 내려와 어느 민가로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옷을 얻어 갈아입은 후 화순으로 갔습니다.>
▲이주하씨(당시 영천 수용소 경비 헌병 중대 중사·예비역 상사=현 서울거주·45)<우리 제1헌병 중대는 부산 가야 수용소, 광주 수용소 등에서 미군과 함께 반공 포로들을 경비하다가 6·18석방 때는 영천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영천수용소는 석방 경보가 사전에 미군에게 새 나가 18일 새벽 대구에서 부군「탱크」5구가 들어와 수용소를 완전 포위하고 한국 헌병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바람에 6·18석방은 완전 실패하고 말았어요.
이튿날 헌총사 조사 관이 내려오더니『3일 이내에 영천 수용소 포로들을 석방시키지 못하면 헌병대의 전 장병들은 자결하라』면서 강력한 석방 지시를 내립디다,
그래서 우리 헌병대는 19일 하사 이상의 30여명으로 석방 결사대를 편성, 대장 김규진 소령의 지휘를 받으며 치밀한 행동 계획을 짰습니다.
결사대는 20일 밤 ⓛ같이 보초를 서고 있는 미군 헌병들을 결박하고 ②수용소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미군「탱크」에 기어올라 고춧가루를 뿌려 미군 경비대의 기능을 완전 마비시키기로 하고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거사 당일에는 부산 지구서 올라온「탱크」까지 합치면 영천 수용소에는 30여명의 부군 「탱크」가 배치돼 있었어요. 밤10시를 기해 미군1명에 3명씩 달라붙어 있던 우리 헌병들이 신호에 맞춰 일제히 달려들어 결박하고 수갑을 채우니까 미 헌병들은『거짓말, 거짓말』하면서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더군요.
그리고는「탱크·라이트」와 전등들을「카빈」사격으로 모두 깨고「탱크」로 기어올라가 주머니에 넣었던 고춧가루를 꺼내 마구 뿌려 댔습니다.
1시간 반 동안의 이같은 작전으로 충고를 제외한 8백 여명의 반공 포로가 성공적으로 탈출했습니다.>

<주요일지> (1953년 3월13일∼16일)
※13일▲「미그」4대 격추 ▲지리산 잔비 1천명 내외로 감소 ▲「체코」비행사 3명, 서방측으로 망명
※14일▲「아들라이·스티븐슨」내한 ▲「네바다」서 지하 핵실험
※15일▲「미그」7대 격추 파 ▲1백50명의 국군 장교도 미 유학 ▲「말렌코프」수상, 최고 회의서 연설. 서방과 평화 공존 강조
※16일▲영 정부, 한국 문제 백서를 의회에 제출 ▲「유고」의「티토」 원수 방영 ▲애급, 영군의 무조건 철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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